칼바람을 뚫고 책모임으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승자다, 절로 그런 마음이 드는 날씨였다. 매정하기까지 한 칼바람을 뚫고서 책모임을 하겠다 나온 건 나까지 사내 넷이 고작이었다. 오늘만큼은 홍대입구를 뒤집어 탈탈 털어도 이런 모임이 없을 거라고, 나는 어딘지 정예병 막사에 들어선 신참병사가 된 듯한 기분을 맛봤다.
먼저 소개하고 싶은 사람 있으신가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적극적인 사람은 오랜만인 듯 운영자의 눈도 따라 번쩍였다. 그가 소개한 책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닥터 데스의 유산>이다. 한 해에도 작품 서너 편은 족히 내는 이 다작의 소설가는 일본에선 꽤나 유명한 모양, 작품을 내는 족족 영화화까지 되고 있다 했다. 작가의 전작까지 찾아 읽은 사내가 그의 소설은 결론을 내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사회문제와 장르소설을 그럴듯한 지점에서 만나게 하는 시치리의 작품은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명성까지 얻을 만큼 화제가 됐다. 사회문제를 바탕으로 결론짓지 않는 전개를 일삼다니, 내가 읽었다면 무책임하다 성냈을지 모를 일이다.
소설의 주제는 안락사라 했다. 이야기는 금세 안락사에 대한 것으로 옮겨 붙었다. 한 명은 안락사가 일반화되기 어렵다 했다. 말기암 환자를 예로 들어 인간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려는 욕구를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약부터 민간신앙까지, 지푸라기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을 나는 너무나 많이 보았었다.
그러나 그 너머엔 온갖 이유를 들어 제 삶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많은 인간들이 있음을 잊지 않는다. 삶이 버거워서, 때로는 고통스럽고, 또 때로는 권태로워서 인간은 제 목숨을 기꺼이 놓아버리고 만다. 그 앞에 고통 없이 존엄을 지켜가며 죽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또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따를 것인지 상상만으로도 절로 아연해진다. 나는 스위스의 안락사 시설로 소설가와 함께 떠난 어느 사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건 소설가 혼자였고, 그녀는 신문에 제가 보고 겪은 일을 기고했다. 안락한 죽음에도 수천 만 원이 필요하단 사실을 나는 그를 통해 알았다. 그러나 그 수천 만 원의 장벽마저 없다면 어떨까. 이 세상에서 죽음이 얼마나 더 가벼워질까 두려운 건 내가 쫄보라서만은 아닐 테다.
나는 이 사회가 안락사가 주는 충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낼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종과 개체의 이해가 갈라지는 수많은 순간들처럼 안락사 앞에선 사회와 그 구성원의 이해 또한 달라지기 십상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신음하는 한국사회가 생산가능인구가 안락사로 이탈하는 걸 기꺼이 감내하려 들 리 없다. 인간이 제 죽음마저 아무렇지 않게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사회는 제 존속을 장담할 수 없을 테다. 그러고 보면 사회란 것도 물가에 설탕으로 빚은 조각 같은 것이다.
온갖 우울한 생각을 떠올릴 즈음이 되어 다음 책의 순번이 온다. 이번엔 운영자의 차례로, 김홍기의 <옷장 속 인문학>이 선택을 받았다. 그는 저자가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 하는데 나로선 금시초문이다. 프라다며 입생로랑의 뒷얘기를 맛깔나게 전하는 그의 강의를 운영자는 몇 번이나 감명 깊게 본 눈치다. 막상 책은 말빨 만큼은 안 됐던 모양이지만 그렇대도 읽을 만한 구석은 있는 듯, 그는 흥미로운 대목을 추려 소개한다.
티셔츠가 갑옷 아래 입던 속옷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 마르크스가 전당포에 코트를 맡겨 생활비를 마련하려 했다가 코트가 없어 도서관 출입을 못했다는 이야기 같은 건 제법 흥미롭긴 하였다. 어차피 몇 달 쯤 지나면 가물가물해질 지식이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지식도 쓸모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패션이 미가 아닌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단 건 인상적인 대목이다. 갈수록 편해지고 자유분방해지는 옷차림 한 편에서 명품브랜드가 굳건한 권위를 과시하고 있단 사실도 재미있다. 한 때의 속옷은 겉옷이 되고, 이제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출근해도 되는 회사가 생길 정도가 되었는데, 어째서 루이비똥은 루이비똥이고 나이키는 나이키인 것인지, 어리석은 나는 부서져내리는 격식과 올라가기만 하는 브랜드가치를 감히 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음은 일본문학을 전공한 사내의 차례다. 일본어로 쓰인 작은 책을 들고 온 그는 제가 가져온 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라 전한다. <노르웨이의 숲>이 원제라곤 하지만 <내일을 향해 쏴라>가 <어쩌고저쩌고 선댄스키드>가 아니고, <겨울왕국>도 <얼어붙은>이 아닌 한국에선 식상한 원제 따윈 개나 줘버려야 하는 것이다. 무튼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를 대표하는 역작인데, 이 소설이 어째서 그토록 훌륭한 작품인지를 이해가 가게 설명하는 이를 나는 단 한 명도 만나본 일이 없다.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상실을 겪게 마련이고, 이 소설이 인기를 얻은 즈음에는 제 문제와 시대를 엮기를 즐겨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가만히 넘겨짚어 보는 것이다. 또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이란 상실이며 우울과 같은 것을 늘상 가까이 두는 편이고 말이다.
읽은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등장인물 말고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이 소설에 대하여 다른 이들은 여적 생생한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성적인 이야기가 우아하게 등장한다거나 인물들이 그야말로 우후죽순 죽어나간다거나 하는 것인데, 나로선 이런 대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당혹스럽다. 그저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노력해도 상처 입을 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란 이야기, 또 와타나베가 봄철의 곰 얘기로 미도리를 꼬시던 장면 정도를 떠올리는 게 고작이다. 이 대목들을 가만히 짚어내다 보니 이 소설이 기억보다는 괜찮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버 가득한 동산에서 뒹구는 봄철의 곰을 이 모진 겨울 가운데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세상에 둘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 차례다. 지난 몇 주 간 박완서를 탐독한 나는 <그 남자네 집>을 소개한다. 아련함, 애틋함, 먹먹함이 깔린 사랑이야기를 박완서는 그야말로 수시로 써냈다. 이 소설도 그중 하나인데, 피천득이 쓴 아사코와의 이야기처럼 오래 보지 못하고 애틋해 하는 사랑이 소설 가득 담겼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서로 짝을 가진 남녀가 남자의 모친상 가운데 만난다. 애끓는 마음이 오가며 무너지듯 안겨오는 남자를 여자가 받아 안는다. 작가는 그 포옹을 물처럼 담담했다고 적었다. 그 포옹은 완벽했고 그것으로 족한 결별이었다고.
나는 박완서의 로맨스가 이 땅에서 다시는 쓰이지 못할 종류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시대의 사랑은 여물기 전에 거두는 농사처럼 너무나 성급하여 기다릴 줄을 모르므로, 그 조급함과 여백없음을 애정과 관심이라 포장하므로, 나는 그와 같은 낭만이 더는 싹트지 못하리라 염려하는 것이다.
모두 네 권의 책이 소개된 이날, 우리는 서로가 어째서 책을 읽는가를 궁금해 하였다. 하룻밤 새 세 명이 참가를 번복할 만큼 야박한 날씨를 뚫고 모임에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를 서로에게 물었다. 누군가는 허영이라 말한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때로 허영은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법이다. 재미진 게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 허영만큼 인간을 독서로 이끄는 게 많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내심 동의하고 만다. 다른 이는 세상의 온갖 재미난 걸 모두 다 해보아서 책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브라질 모델과 요트도 못타봤고 일본의 곰과 클로버 동산을 뒹굴어보지도 못한 나는 좀처럼 그에게는 공감하지 못한다. 재미 순으로 책까지 다다르려면 100세 인생으론 부족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일종의 의무이진 않을까. 글에, 문장에, 이야기에 감격했던 어린 시절, 끝까지 읽고 끝까지 써보겠다 다짐했던 그 시절 세운 언약을 나는 여적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읽기를 멈추는 건 늙기를 허락하는 거란 마음으로, 세상 재미대가리 없는 글조차 어떻게든 읽어내려 하는 것이다.
세상의 온갖 재미진 것들과 경쟁하게 된 글의 운명이 한 편으론 서글프고 한 편으론 대견하여 나는 그 승패가 어떠할지 의견을 구한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는 가운데 오로지 운영자만이 영화를 상대로도 글에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듣고서 나는 그만 힘이 쫙 빠져버린다. 글이 혼자서도 쓸 수 있고 빠르게 생산이 가능하므로 공을 들여야 하는 영화보다는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 한 문장, 한 단락에도 삶을 담아 전할 수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글이 가진 마지막 희망마저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다음 달이면 나올 내 에세이집은 몇 권이나 팔리려나. 생각할수록 두려운 마음이어서 나는 찬바람을 맞으러 나갈 뿐이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