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진 대화로 가득한 책모임
매슬로우의 욕구론이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가 싶었다. 이미 죽어버린 학자의 오래 전 격파된 이론임에도 책 깨나 읽는다는 이들이 흥미진진하게 논의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욕구에는 층위가 있고, 생리부터 자아초월까지 여덟 단계가 그 계단을 이룬다는 게 이론의 골자다. 이해하기 쉬운데다 직관적으로도 그럴 듯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도 이쪽 분야에 흥미가 깊은 이들 사이에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마침 오늘이 그날이었는지, 이 책이건 저 책이건 매슬로우가 자주 얽혀 나온다. 그런 날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매슬로우는 생리적 욕구가 해소된 뒤 안전욕구가 펼쳐지고, 그 다음엔 소속 및 애정욕구, 다음은 존중욕구, 최상위에 이르러야 자아초월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자연히 그게 욕구의 전부냐는 비판이 잇따라서 처음엔 다섯이던 것이 다음에 여섯이 되고 다시 여덟로 강화되어 나갔다. 어찌됐든 이 이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목이란 생리적 욕구 다음에야 애정이며 존중 따위가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고 군자도 배를 곯으면 남의 집 벽을 탄다는 게 이 이론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인간은 낮은 단계의 욕구를 해소한 뒤에야 그 이상의 욕구를 품을 수 있다는 것, 그 시작은 잘 먹고 잘 싸고 당장 죽지 않는다는 확신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반대를 하겠는가.
근래 여러 병원에서 면접을 보고 다닌다는 그녀는 <면접의 키포인트 55>를 책상 위에 꺼내놨다. 아니 책모임에 웬 면접? 처음엔 의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쯤 생각하니 직장이 곧 그 이의 경쟁력이 되는 요즘 세상에서 면접 포인트 서적이란 인기가 있을 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하룻밤에 읽는다는 이 책의 카피가 마음에 들었다며 책의 요모조모를 하나씩 소개한다. 살아 있는 눈빛을 짓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그밖에 면접관을 사로잡는 온갖 지침들이 망라된다 하였다. 수많은 면접에서 패퇴했던 나다. 한 번이라도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테이블 리더는 면접이란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하는 것이라고 첨언한다. 일단은 회사가 원하는 뽑히는 인재를 연기한 뒤 들어가고 나서 제 모습을 보이는 것이란다. 나는 그 말에 고개가 끄덕인다. 한때는 내가 면접이 능통한 인간인 줄 알았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를 척척 붙었었고 언론사로 방향을 돌린 뒤에도 한 번에 합격통지를 받았었다. 뭣도 모르던 강백호가 그러했듯 나는 내가 귀재라서 그렇다고 믿었다. 이봐이봐 천재는 결국 어디서나 빛을 발한다고. 그런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오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졌다. 항해사 자격을 따고 선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동기들이 죄다 취업에 성공한 뒤까지 적을 구하지 못한 채 남겨졌다. 나쁘지 않은 실습을 마치고도 연장계약을 하지 못한 채 커리어를 끝냈다. 기자로서도 썩 괜찮은 평판을 얻었지만 마땅한 이직처를 구하지 못했다. 들어가고 싶은 회사 면접자리에서 나는 면접관들을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오래 전 모범적 인재를 연기할 땐 줄줄이 합격하던 것이, 훨씬 나은 커리어며 역량을 갖춘 뒤엔 줄줄이 낙방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차이는 하나, 나는 더 이상 면접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간절할수록 거짓을 연기해야 하는가, 이를 고민하고 있자니 한 이가 가치관이 맞는 이를 만나면 그뿐이라 했다. 최근 음악을 함께 할 동료를 모집했다는 그는 제안한 여러 조건이 부족했음에도 가치관이 맞아 유능한 이를 붙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일일까.
문득 결코 쉽지만은 않은 연애가 떠오른다. 내가 마음에 드는 이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확률, 그건 얼마나 희박한가. 내가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할수록 솔직한 자세가 독이 되는 경우는 또 어찌나 많은지. 그럴 때면 오히려 추파며 작업이라 불리는 기술이 빛을 발하고는 한다. 진심이 아닌 기술, 면접도 그와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진심이 담긴 거짓이 투박한 진실을 압도 하는 광경은 흔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이야기는 몸담을 곳을 고르는 일에 대한 것으로 옮겨간다. 매슬로우의 이론에 한 때 빠졌다는 어느 이는 그러나 그 층계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는 모습이다. 생리적 욕구 뒤에 다음 욕구가 피어난다는데 그는 다음 욕구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단 것이다. 생리적 욕구를 꾸준히 다이어트하여 그에 매이지 않는 것, 나아가 제가 따르고픈 고층위의 욕구에 매진하는 게 그에게는 가치 있는 삶이다. 일을 선택할 때 역시 그와 같이 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테이블리더는 그와 정 반대편에 섰다. 직장은 어디까지나 돈을 벌기 위한 것, 돈만 많이 주면 네 발로 기어서 다닐 수도 있겠단다. 자아실현이니 존중이니 하는 건 퇴근 뒤에 홀로 챙기면 그만이란 것이다. 책을 가져온 이는 존중이 중요하다 말한다. 여러 직장에서 면접을 보며 누구는 세전과 세후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또 누구는 기본급 대신 수당으로 월급을 맞춰주는 행태를 자주 보았다 했다. 마음에 차지 않아 가지 않겠다 한 어느 회사에선 카톡으로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하였다는데, 그런 회사를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 덧붙인다. 말하자면 처우가 곧 존중이란 자본주의 세계의 분명한 규칙을 재확인했다는 뜻이겠다.
나는 어떠한가. 내게 업은 돈이며 처우만으론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축을 이루기는 하지만서도.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그 일을 의미 있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시간을 바쳐 임할만한 일, 그것이 충족된 뒤에야 다음을 고려할 가치가 있다. 처우와 워라벨과 비전, 그 셋이 업에 대한 긍지 다음에 선다. 앞선 것은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뒤에 선 셋은 그중 한둘만 갖춰지면 다른 것쯤 모자라다 해도 견딜 수 있다. 요컨대 내게는 타협할 수 없는 것과 협상할 수 있는 것이 나뉘어 있다. 이를 매슬로우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자존이며 자아실현의 욕구까진 있다는 것인데, 이 모두가 기초적 욕구가 얼마쯤 충족된 덕이니 부모며 환경에 감사할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가치관이 중요하단 이는 법정의 <스스로 행복하라>를 가져왔다. 출가한 수도자이자 지난 세대 불가의 거두이며 시대적 스승으로까지 여겨진 법정의 산문 여럿을 한 권에 묶은 책이다. <무소유>를 무척 좋게 보았다는 그는 이 책에서 법정의 날카로운 비판이며 선명한 욕구가 읽혀 좋았다고 말한다. 매슬로우의 최상위 욕구가 법정에게도 읽혔다는 것인데, 출가해 무욕의 삶을 사는 수도자의 글에서 욕구를 읽어낸 그의 독서가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면 수도는 다른 방식의 치열함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고 그 치열함은 나름의 욕구로부터 출발할 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욕구를 비워내는 것도 욕구라 할 수 있다면 세상에 욕구가 없는 경지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김영하의 <작별인사>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할 것이다. 내가 읽은 이 책은 수 년 만에 나온 김영하의 SF소설로,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책은 현대 과학과 철학이 마주하는 수많은 경계를 오가는데, 이를테면 뇌를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영생을 살거나 고통을 제거한 죽음을 고민하며 이미 죽은 이를 다시 살려내는 미래인들의 이야기가 여러 에피소드에 담겨 있다. 우리는 개중 뇌를 업로드하는 대목을 이야기하였는데, 육체가 사라지고 그 유한성이 소멸한 상태의 존재가 그 전과 동일한 욕구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가 흥미롭게 오갔다. 인간이란 결국 제가 속한 곳에서 신분과 지식, 성별이며 인종에 따른 수많은 제약을 안고 사고하게 마련이다. 뇌를 업로드하면 가히 초월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적 지성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그때의 인간이 오늘과 같은 욕구를 가지리라 기대하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어쩌면 인간은 욕구를 가졌기에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욕구는 인간을 좌절시키지만 때로는 즐겁게도 한다. 그중 좋은 쪽만을 가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선택할 수 있대도 나는 욕구를 가진 나약한 인간으로 죽기를 선택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모든 인간이 같은 생각을 할리가 없다. 한 참석자는 과거의 인간이 인류의 오늘을 생각하며 나아온 것이 아니라 말한다. 한 세대엔 그 세대가 목표하는 이상이 있는 것이고 또 각 세대가 누리는 서로 다른 욕구 또한 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어떤 단계가 실현되고 나면 또다시 다음을 꿈꾸는 게 인간일지 모른다. 매슬로우의 층계가 그렇듯이. 오늘의 나는 욕구를 가진 인간을 찬양하지만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의 나는 욕구가 거세된 클라우드 위의 지성을 양팔 벌려 환영할지 모른다. 그것이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닐까.
김영하의 신작은 노골적 대사로 현대 과학이며 철학의 더는 논쟁적이지도 않은 논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심지어는 새로운 영역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현대 세계적인 SF소설이 각고의 노력을 들여 끝없이 경계 너머를 탐색하고 있단 걸 고려하면 민망하기까지 한 일이다. 그에게 크게 기대한 만큼 나는 더욱 실망하고 만다. 더 나은 글을 쓰리라고 나는 오랫동안 그를 기대하였는데 그는 오랜만에 돌아와 지식소매상이나 다름없는 식상한 이야기를 그보다도 식상한 형식으로 풀어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매슬로우나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고 김영하가 써내려간 소설 역시 그와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따위 지성들이 클라우드 위에 올려진다면 우리는 금세 AI들로부터 잉여데이터 취급을 받고 삭제될 지도 모를 일이다.
테이블 리더가 가져온 책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는 정재민 전 판사가 지은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를 가져왔다. 그의 글에선 법과 법 앞에 놓인 이들에 대한 현실적이고 온정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했다. 많은 이들이 AI가 판사를 하는 게 낫겠다 말하는 시대, 그럼에도 인간 판사에게 희망을 보는 게 맞지 않느냐는 그런 기대를 하게 한다고 했다. 나는 내가 만났고 들었고 또 뉴스를 통해 보았던 수많은 형편없는 판사들을 떠올린다. 재판 당사자가 수긍할 수 없는 판결을 무성의하게 내린다거나, 시민들에게 모욕을 주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거나, 제 여가만 챙길 뿐 남의 인생이 걸린 사건을 가벼이 취급하는 몹쓸 판사가 이 나라엔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존경스럽고 감탄하게 하고 수고로운 일들을 기꺼이 감내하는 몇몇 판사들도 보아왔던 것이다. 인간은 AI가 따르지 못할 미덕을 반드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법정 스님이 그러했듯 매슬로우의 최상위 욕구까지 도달하고야 마는 그런 인간이 세상엔 분명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오랜만에 모임에 얼굴을 비춘 한 사내가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를 말한다.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다룬 이 소설이 상당히 흥미진진하여 읽는 내내 지루할 줄 몰랐다고 말이다. 우리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해야 했다 말하는 적지 않은 이들의 의견에 대하여 각자의 생각을 붙인다. 침략의 역사가 과연 존경할 만한 것인지를, 변방소국의 열등감에서 출발한 불안한 감정은 아닌지를,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고 저 멀리까지 나아갔다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 지를 흥미롭게 논한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은 것이어서 어제 좋은 것이 오늘은 나쁘고, 오늘 나쁜 것이 내일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멀리 정벌에 나섰다면 오늘의 한반도에 우리말을 하는 이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런 불안을 떨칠 수가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은 다음 시대 학자들에게 처참히 얻어맞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그만큼 매력적인 이론도 많지만은 않은 것이니 세상사가 다 그렇고 그런 것, 우리는 오늘을 그저 한껏 즐기기로 한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