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를 의지하여 나아갈 뿐

다를 수록 매력적인 책모임에 대하여

by 김성호

내가 좋아하는 자리였다. 다섯 사람이 저마다 읽은 책을 들고 찾은 자리, 그러나 어느 하나도 다른 것들과는 달랐다. 꼭 제가 있을 자리에서 저를 빛내는 이 책들이 다섯이 모여 한 자리를 이루는 별들처럼 보여서 그 자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어느 것은 밝게 빛나고 다른 것은 흐릿하며 또 어느 것은 타오르는 붉음이라면 저 멀리 떨어진 무엇은 시리게 차거운 백색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 적힌 책을 가져왔다. 이 책이 오래전 읽은 <대망>의 본래 이름이란 것을 나는 설명을 한참 듣고서야 알았다. 나카무라 도키조가 지은 이 장대한 소설은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다. 오다 노부나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는 전국시대 패자를 다룬 걸출한 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는 이제 막 3권을 읽은 참인데 29권이나 남아 있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말한다. 3권에서 이에야스는 아직 어린 아이일 뿐이라니 이야기는 거의 진척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곧 자라서 유력한 다이묘로 성장하고 오랜 시간을 견딘 끝에 마침내 패자에 이른다. 일본을 잘 안다는 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지만 오랜 전국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오늘의 일본에 남긴 유산을 알지 못한다면 그 앎이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다.


사람들은 대하소설을 읽기가 겁난다고 말한다. 사실 열 권이고 스무 권으로 나누어진 대하소설은 갈수록 인기를 잃어가는 추세다. 요새의 독서야 읽고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주변에 이야기도 하고 SNS에 올리기도 해야 하는 것인데, 최소 몇 주에 몇 달까지도 걸리는 대하소설은 가성비가 영 좋지 않은 탓이다. 서른두 권을 읽고도 한 작품만큼 자랑하는 꼴이니 그 새 서른 두 작품을 읽는 것이 훨씬 낫다 여기는 이들이 있을 밖에 없다. 심지어는 너무 긴 이야기는 지루하리라는 선입견까지 씌워지곤 하는데, 나는 그와 같은 오해를 무척 안타깝게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대하소설이 많은 권수를 갖는 건 그 태생적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이런 류의 소설은 문예지며 신문에 연재를 하며 쓰이는데, 독자의 호응을 이끌고자 편마다 적절한 위기며 극복, 결말이 배치되게 마련이다.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관심을 받으며 오래 연재한 소설이 한 권짜리 단행본으로 처음 소개된 작품보다 읽는 재미가 클 가능성이 높은 건 자명한 일이다. 무협지며 판타지, 근래의 웹소설이 그러하듯 그 옛날 연재소설도 시대의 독자들과 호흡을 맞추며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그럼에 권수가 많다는 이유로 읽기 어려울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건 가혹하며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다.


나는 책을 가져온 이에게 이자와 모토히코의 <야망패자>를 권해본다. 이 소설도 같은 시대를 다루는데, 모두 7권으로 훨씬 빨리 읽을 수 있다.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는 패자들을 중점적으로 쓰였다면, <야망패자>는 다케다 신겐부터 우에스기 겐신 등 한국에선 다소 덜 알려진 걸출한 다이묘를 중심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패자가 되는 데 실패했지만 시대를 갈랐던 영웅들의 이야기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갖지 못한 시선을 <야망패자>는 가지고 있으니 두 소설을 교차해 읽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독서가 될 테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내는 틈틈이 소설을 쓰고 있다 말한다. 그는 소설을 쓰고 합평하는 모임에도 나가고 따로 학원까지 다니는 모양으로, 올해 한 신문사 신춘문예 공모에 최종까지 올랐다고 했다. 그가 가져온 책도 글쓰기에 대한 것인데 제목은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이다. '궁극의 소설 쓰기 바이블'이라 적힌 카피문구를 보며 나라면 절대로 이런 책을 집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떤 자신감으로 궁극이며 바이블이란 말을 붙일 수가 있는 걸까 궁금증도 함께 솟는다.


단편소설에 정통한 작가 데이먼 나이트가 쓴 이 책은 1981년 처음 출간된 이래 작법서 가운데는 드문 성공을 거둔 모양이다. 이런 책을 읽지 않는 내게는 완전한 초면이지만 여기저기 물어보니 아는 이가 적지 않다. 책을 가져온 이의 소개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내용들이 여럿인 듯하니, 반드시 읽어야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고 결심한다. 불세출의 천재조차도 다른 무엇에 빚지고 있는 것, 나 따위가 이미 성공한 작가에게 훈수 좀 듣는 것을 꺼릴 필요는 없겠다.


다음에 소개된 책은 신경숙의 소설이다. 문단을 넘어 사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표절작가 신경숙이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그녀의 표절은 그저 유혹에의 함락을 넘어 문인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는가. 그 상습성이며 세계 전체를 훔쳐오는 비양심은 적어도 예술의 세계에서 결단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심지어 표절사태에 대응한 태도며 이후 이어진 복귀과정에 이르기까지 신경숙은 글쟁이가 지켜야 할 금도를 수차례나 넘어섰다. 수많은 유혹 앞에서 절대로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다짐한다. 표절은 다른 누구보다 훔치는 그 자신을 해하는 법이니까.


나는 백종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백종현 선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칸트연구자로, 이 책 역시 칸트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칸트 3대 비판서와 관련한 특강을 요약한 책으로, 하나하나 읽기 까다로운 난해한 저작을 그나마 읽을 수 있게 소개한다.


기실 칸트만큼 오늘의 독자에게 큰 오해를 사는 학자도 많지는 않다. 칸트는 정언명령이란 개념과 함께 평생 한 도시에서 틀에 박힌 삶을 산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꽉 막힌 꼰대쯤으로 기억하는데, 기실 그는 그런 꼰대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칸트는 일생에 걸쳐 도전자였고 삶의 여러 순간마다 쉽게 성공이며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독일 아주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만 살았다. 부모는 넉넉하지 못했고, 두뇌며 육체도 그리 잘 타고나진 못했다. 예술이나 문화도 충분히 접하지 못했으며, 지식인들과의 교우 역시 드물었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교수직을 겨우 얻었고, 혁명적이라 해도 좋을 책 <순수이성비판>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에게 인내와 성실, 도서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도 없었을 테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해냈다.


칸트는 시대를 지배하는 것들과 기꺼이 맞선 투사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 위에 세워 철학 위에 넘실거리던 기독교적 개념들을 송두리째 뽑아 옮겼다. 이를테면 신과 기적, 천사와 악마, 천국과 영혼 같은 것이 칸트로부터 철학 바깥으로 밀려났다. 서서히 인기를 얻어가던 공리주의의 효율적 판단에도 칸트는 맞섰다. 칸트에게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어서나 하면 좋아서가 아니라 해야만 해서 하는 것이다.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 씨앗을 뿌리고, 승리에 대한 기대 없이 전장으로 나아가는 그런 이들만이 칸트적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칸트는 제 삶으로 제 철학을 입증해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칸트뿐 아니라 연구자 백종현을 읽을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칸트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읽히는 이 책을 보고서 나는 백종현이란 사람이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언제나 더 나아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 책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다. 소설가로 김영하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나지만 에세이스트로는 그가 꽤 괜찮은 글을 쓰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보았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적어도 십 수 번은 들은 일이 있는데, 아직 책을 집어 읽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여행과 에세이와 일류 소설가의 만남이 성공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다. 책을 가져온 이의 설명을 들으며 나도 언젠가 이 책을 읽게 되리라는 확신을 얻는다.


여행은 사람을 키운다. 인간이란 결국 경험으로부터 성장하는 것이고 좋은 여행은 충분한 자극을 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일생 한 도시에서 살았던 칸트는 도서관에서 제 안으로의 여정을 떠났고, 누군가는 바깥으로 나아간 뒤에야 저와 만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배를 타고 50여개의 항구에 들러 낯선 이들을 겪어내고 난 뒤의 내가 그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졌음을 내가 가장 잘 안다. 여행이란 결국 경계 너머로 떠나는 일이고 나는 그 일이 가져오는 멋진 결과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영하가 여행을 할 줄 아는 이라면 나는 언젠가 그의 소설을 다시 집어 읽게 되리라.


어느 한 권의 책도 다른 책과 전혀 다른 빛을 발하는 이 자리에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 기꺼이 나아가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시리게 푸른 곳으로, 넘실대는 붉음으로, 느끼고 맛보는 내 육신을 밀어서 내가 겪지 못했던 곳으로 나아가야겠다고. 모두가 저만의 상대와 싸우는 게 삶이다. 누군가는 훔치는 것을, 누군가는 공들여 배우려 하고, 또 누군가는 끝끝내 스스로 빚겠다고 고집한다. 누군가는 승리하여 패자가 되고, 누군가는 실패하여 모든 것을 잃는다. 그 끝에서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저 나를 의지하여 나아갈 뿐이다. 오래 전 인기 없는 철학자가 그랬듯이.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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