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 하며 읽어내기
한때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옳은 것과 틀린 것이, 그야말로 온갖 것의 경계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아가야 할 길과 가지 않아야 할 길도, 가고픈 길과 꺼려지는 길도 코앞에 펼쳐진 듯 분명하였다.
언제부턴가. 더는 무엇도 분명하지 않았다. 옳은 것이 틀린 것이 되고, 즐거운 일도 금세 슬퍼지곤 하였다. 세상 모든 사물엔 이면이 있어 때로 장점이 단점이 되고 얼마든지 그 반대도 가능하였다.
서머셋 몸의 책을 가져온 이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저와 달라서 멋져 보인다고 말했다. 저와 다른 이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그는 제법 순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는데 소설 속 안정된 증권중개인의 삶을 살던 40대 주인공은 가진 모두를, 심지어는 처자식조차 내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순탄과는 꽤나 먼 삶을 산 폴 고갱의 이야기가 바탕인 이 소설은 가슴에 열망을 품은 모든 이에게 경전과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나는 세상 모두가 그와 같을 수는 없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평생을 산다. 그러니 인생을 내던져 좇을 무엇도 없는 것이다. 다른 누구는 제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이 있음을 안다. 그중 누구는 그 불꽃을 따라 삶을 던지고, 또 누구는 불꽃을 달래며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러나 그중 무엇이 바람직하고 다른 무엇은 그렇지 않다고 그 아닌 누가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 심지어는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 가치가 있다고도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달과 6펜스>의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나는 내가 읽은 <검사의 죄>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씻지 못할 비극을 겪은 아이가 검사가 된 뒤 마주한 음모를 그린다. 검찰에 대한 고증이 제법 신선하여 이런 류의 소설을 시시하게 여기는 내게도 제법 흥미를 자아낸다. 적어도 중반까지의 전개는 속도감도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을 만하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모두에게 추천한다 말한다. 검찰이라는 기관은 오늘의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 중 그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여전히 현실인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이 소설에 묘사된 검찰의 비리가 완전히 사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내 곁에 앉은 여자는 손원평의 <아몬드>를 말한다. 그녀는 표지의 일러스트와 여백 많은 책장이 책을 집게끔 이끌었다 말한다. 뇌 문제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너무 흔하다 싶으면서도 이토록 오랫동안 선택을 받는 소설엔 나름의 승부수가 있으리라고 은근한 기대를 가져본다.
그 맞은편의 여자가 가져온 책은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자기계발서 중 하나인 <역행자>다. 처음 이 책을 알았을 때 나는 본능적인 반감을 가졌다. 그러나 이 책은 제 방식으로 마침내 베스트셀러 반열에 들었고, 아직까지 널리 읽히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다시 또 많은 이를 설득하여 더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이끌고 있으니 나는 내가 틀렸다고 인정할 밖에 없다. 순행자와 역행자의 거친 이분법이며, 제가 아는 게 전부라는 어설픈 확신에 묘한 반감이 일지만 어찌됐든 그는 제법 많은 독자를 설득해내고야 만 것이다.
나발 라비칸트의 트위터 글귀를 프린트해 온 이도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창업자라는 라비칸트는 트위터에 통찰이 담긴 글을 쓰는 걸로 명성이 자자하다는데, 그의 독자 중 하나가 아예 이걸 책으로 만들어 올려두었다고 한다. 이 책은 인터넷에서 무료로 배포됐다는데, 트위터에 남긴 글을 정리해 보려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며, 이를 무료로 배포하는 저자의 배포까지가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책을 가져온 이는 부에 대해 말했다. 부라는 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넘어 대체 불가능한 시간을 사는 일이라고, 욕구는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행복하지 않겠다는 계약 같은 거라고, 그밖에 다양한 명언이 실린 잠언집이 이 책이라 하였다. 책임을 다할 만큼 돈을 벌어야만 하는 평범한 이들에게 여기 실린 글귀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깨달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보단 나은 가르침이 있으리라고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말없이 앉았던 사내는 <고전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를 이야기한다. 라비칸트며 <역행자>를 쓴 이도 성공의 필수요소로 독서를 말했다. 인간의 지식이란 결국 기록을 통해 전승되게 마련이고, 시간의 냉혹한 심판을 견뎌낸 고전만큼 검증된 지식의 결정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가져온 이는 기억에 남는 대목으로 리스크를 언급한 문장을 이야기한다. 그는 리스크를 고려하지 말고 결정하라는 취지의 고전을 읽으며 도리어 제가 리스크를 고려하는 인간이란 걸 알았다고 했다. 모로 보나 삶에서 리스크를 고려하는 게 합리적이란 것이다.
리스크를 고려해 결정하는 게 더욱 합리적이란 쪽으로 의견이 모여지는 가운데 나는 꼭 그러한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영화 <가타카>엔 우월한 유전자를 조합해 태어난 동생과 평범하게 자연적으로 출산된 형이 등장한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부표를 돌아오는 둘의 수영시합에선 늘 형이 승리를 거머쥔다. 언젠가 동생이 형에게 그 비결을 묻자 형은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나는 부표까지 가는데 온 힘을 다하고 다시 돌아올 힘은 남기지 않았다고. 명장 한신이 물을 뒤로 하고 진을 친 것 역시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는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필사즉생의 각오만이 인간을 승리로 이끌 때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서머싯 몸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모두가 그러한가 하는 마음을 감추지는 못한다. 신립의 배수진은 조선을 위태롭게 했고, 힘을 남기지 않는 수영이 많은 이를 익사케 했음을 쉬이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 무엇도 어느 한 면만으로 짐작할 순 없는 일이다.
모임 내내 지루함을 보인 사내는 사진집을 두 권 가져왔다. 개중 하나는 내가 전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진들과 비슷한 느낌이라 여겼는데 나중에 들으니 꼭 그 사진집이었다. 친구의 어린 딸의 여름방학을 찍어준 그 느낌 있는 사진집은 우리 돈 이 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나왔는데 이미 절판이 되어 오 만원 가량에 구했다고 했다. 과연 살만한 사진집이겠거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저런 분위기의 사진집은 펼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말랑하게 하겠거니,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건 웬만한 솜씨로는 어려운 일이니.
그는 쨍한 사진보단 뭉뚱한 필름사진의 정서가 좋다고 하였다. 그는 왕가위의 영화를 특별히 좋아한다고도 했다. 나는 그에게 비슷한 사진이며 영화를 좋아했을 법한 주인공이 나오는 <요노스케 이야기>를 추천했다. 나는 그에게 한 장의 사진을 위해 한참을 기다리고 생각하던 필름시대의 정서가 그립다고 말했다. 그는 동의를 표했다. 무엇이든 쉬워질수록 한 편엔 잊혀져가는 것이 있다. 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슬픔을 건너 무엇을 붙드는 건 멋진 일이기도 하다. 사진이란 것도 꼭 그렇지는 않은가. 지나가는 순간을 붙드는 찰나의 예술이니.
정신과 전문의 임세원의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가져온 이도 있었다. 나는 임세원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나 말고도 적잖은 이들이 그 죽음을 기억한단 사실이 놀라웠다. 우울을 겪고 있다는 이는 제게 닥쳐온 어려운 일들과 그 일들이 남긴 상흔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나는 그와 같은 고통에도 이면이 있을까를 가만히 생각하였다. 누군가는 떡볶이만 먹고도 나아지는 감정이, 누군가에겐 바닥까지 치는 겪어냄을 통해 겨우 살만해지기도 하고, 온갖 약물로도 저항하기 어려울 만큼 구석으로 몰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망가짐 앞에서 완전히 망가지지 않겠다는 저항은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
그는 이 책이 증상을 대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우울의 근본을 찾고 바꿔나가는 실천이 삶을 그 절망으로부터 길어 올릴 수가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파멸이 수십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침을 생각하고, 제 절망을 어떻게든 대해내겠다 마음먹는 이의 용기를 생각한다.
가볍게 나온 이날의 모임에서 성공과 취향과 나아짐과 망가짐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삶의 모양들을 떠올렸다. 나의 세상은 전보다 훨씬 불확실해졌지만 나는 그것이 좋다. 언제나 더 나은 면이 있을 것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