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1890년대 초, 미지의 땅을 밝히겠다는 열의로 불타던 삼십대 중반의 젊은이 알렉상드르 예르생은 길잡이들과 함께 연거푸 탐험길에 오른다. 주된 목적은 나짱으로부터 사이공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 그밖에도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소득이 될 여정이다. 그때만해도 작은 어촌이던 나짱을 베이스캠프 삼아 떠난 두어 차례 여정에서 소득 없이 후퇴한 예르생은 1893년 마침내 큰 발견에 이른다.
오늘날 광대한 베트남의 영토는 대부분 열대 밀림과 산악지로 이뤄져, 사람이 들어가 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바닷길을 제한다면 육로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북부와 중부, 남부의 이동이 사실상 단절된 형편이었다. 이는 프랑스 식민당국에게도 커다란 장애가 되었는데 베트남의 산물이 부패하기 전 본국으로 실어나를 유통망을 마련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탓이었다. 비행장이 있는 하노이와 사이공에서 소규모 화물이 오갔지만 드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뿐인가. 프랑스가 식민지화한 남부 베트남, 이른바 코친차이나의 열대기후는 유럽인에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안 좋은 이들은 진을 빼는 무더위에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심심찮았다. 열대 기후에선 군기 또한 땅에 떨어져 좀처럼 영이 서지 않았다. 베트남과 프랑스를 지금처럼 쉽게 오갈 수 없던 당시의 형편에서 베트남 내 선선한 지역을 찾아 군사기지며 병원과 요양원, 휴양지를 마련하겠다는 요구가 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1893년, 예르생은 이 같은 요구에 딱 맞는 땅을 발견한다. 낮은 곳이 해발 1500m 정도로 랑비엔 고원이라 이름붙은 이 지역은 코친차이나 경계를 넘어 있긴 하였으나 안남 남부로 사이공과 채 300km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 동부 해안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나짱과도 직선거리로 150km 정도 떨어져 있어 길만 내면 쉽게 오갈 수 있었다. 프랑스가 찾아 헤매던 시원한 땅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일대를 뒤져도 초가 스무 채 정도가 고작이던 이 곳이 프랑스의 휴양지며 군사기지로 개발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누군가는 달랏(Da Lat)이란 이름이 '어떤 이에겐 즐거움을, 어떤 이에겐 새로움을'이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 'Dat Aliis Laetitiam Aliis Temperiem'에서 따온 것이라 말한다. 근거가 없는 얘기이긴 하지만 이 도시의 유래며 역할과 꼭 맞는 것이어서 정말로 그러했으면 하는 기대가 들 정도다.
예르생의 제안과 이를 받아들인 폴 두메르 총독은 함께 현지 답사까지 한 끝에 달랏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달랏엔 코친차이나 핵심 도시인 사이공과 판티엣을 오갈 수 있는 도로가 났고 십수년 만에 작은 산골에서 지역 최대도시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달랏이 얼마나 매력 있는 땅인지는 직접 가보면 바로 안다. 특히 베트남 일대에서 한동안 여행을 한 뒤 가게 되면 프랑스인들이 달랏을 처음 가보고 느꼈던 감동을 곧장 느낄 수가 있다. 숨막히는 더위를 단박에 씻어내는 선선함이라니!
바오 다이 황제가 여름 별장을 둘 만큼 귀한 땅으로 여겨졌던 달랏은 프랑스인들이 떠난 뒤 한동안 버려졌다 1990년대에 이르러 관광도시로 거듭난다. 폐쇄적 이념대립 시대가 끝나고 도이머이 정책이 진행된 덕이다. 방치됐던 프랑스식 리조트며 휴양시설은 달랏만의 특색이 되었고, 선선한 기후 속 베트남과 프랑스 문화의 절묘한 조화가 이곳을 찾는 이를 즐겁게 한다. 말 그대로 즐거움과 새로움을 함께 맛보는 세계 어디에도 내보일 수 있는 휴양도시가 바로 이곳 달랏인 것이다.
달랏을 발견하고 이곳이 개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예르생을 달랏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달랏에선 그가 평생을 바친 나짱과 마찬가지로 어딜 가나 예르생의 모습을 쉬이 마주할 수 있다. 이곳 예르생 공원이 그 대표격으로, 오늘날 달랏과 나짱에서 이 위대한 인물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나짱에선 학자이고 달랏에선 탐험가로 기려지는 예르생의 삶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이끈다. 낯선 땅에서 그와 같은 생각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행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일 테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