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달랏 제일명소를 물으니 누구나 바오 다이의 여름 별장을 가리켰다. 흔히 서울 사람들이 경복궁을 내세우듯, 외국인이 가장 자주 찾는 명소이기 때문인 듯 했다. 역사라 해봐야 120년, 뿌리깊은 무엇을 찾아보기 어려운 휴양지라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딱히 바오 다이에게 호감을 갖고 있진 않았으나 긴 일정 가운데 시간도 넉넉하여 남들 다 가는 곳은 가보자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망국의 황제는 어느모로 보아도 좋은 자리가 못된다. 유능한 자는 일생이 괴롭고, 못난 자는 역사의 죄인되기 십상이다. 서구 열강과 일제에 의해 짓밟힌 나라는 모두가 마찬가지, 바오 다이 또한 대한제국 고종이나 영친왕, 청조말 부이와 같은 삶을 살았다. 지배자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어찌할 수 없어 내린 결정들이 저를 갈수록 옭아매었다. 패망해가는 나라가 백성을 돌봤을리도 만무하다. 백성이 이미 등지고 몸은 적에게 붙들린 황제가 어떻게 역전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저 몸성히 퇴위하여 망명갈 수 있었단 게 다행 중 다행이다.
사람들은 흔히 망국의 마지막 황제를 암군이라 욕한다. 그러나 이는 간편하고 무책임한 해석이다. 적어도 역사 가운데 그런 평가를 내리려 한다면 다른 이였다면 다른 결과가 따라야만 할 것이다. 바오 다이의 자리에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단 평가를 듣는 이를 세웠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 영친왕의 자리에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이 있었다면 또 어떤 결과가 따랐겠나. 이미 깨진 그릇엔 물을 담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담으려는 노력조차 일을 더 나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영민하거나 용감했대도 달랐을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더욱 불행해졌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의해서든, 일제에 의해서든, 어쩌면 베트민이나 응오딘지엠에 의해서까지 험한 결말을 맞았으리라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이다. 시대는 왕조 너머를 원했고 인종과 종교, 이념을 초월하여 베트남을 묶어낼 수 있는 이는 민중 가운데 태어나 수많은 역경으로 다져진 영웅이었다. 마침 베트남은 그와 같은 이를 가졌고, 바오 다이에겐 기회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큰 것을 보전하라 보대(바오 다이)란 연호를 썼으나 큰 것이라 부를 것은 죄다 말아먹을 밖에 없었다. 신하라는 것들은 줄줄이 배신하고 부릴 수 있는 조직 또한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 프랑스 강점 앞엔 늘 허수아비였고 일제의 잔혹함에도 대항하지 못했다. 그 무력과 무능 앞에서 제 정신을 보전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가.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선택지라면 스스로를 내던져 산화하는 일 뿐이었겠으나 황제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것 또한 황제다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바오 다이의 무능과 무력에도 그를 암군이었다 비난하고 싶진 않다. 바로 이것이 내가 그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이다.
그에게 허락된 건 오로지 향락과 사치였다. 바오 다이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고 저의 무능과 비겁을 제 생존의 비결로 삼았다. 어떤 이에게 이는 추한 일일 수 있겠으나 내겐 그보다 슬픔이 먼저 읽힌다.
달랏 별장은 프랑스식 빌라다. 전국에 흩뿌려진 바오 다이의 별장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규모로, 실제로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종종 숲으로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던가 보다. 남아 있는 가구며 물건들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가끔 멀리서 찾아오는 소식과 별 의미 없는 한담 뿐, 한심하고 무력한 삶이 아닌가.
적어도 바오 다이는 베트남의 몰락을 더 빠르게 하진 않았다.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그에겐 희망이라 부를 것도 없었으므로.
누가 무릎을 꿇고 청하여도 나는 내 방 침대와 바오 다이의 침대를, 내 서재와 바오 다이의 책장을, 내 홈시어터와 바오 다이의 책상을, 내 화장실과 바오 다이의 화장실을 바꾸지 않을 테다. 삶 또한 마찬가지, 박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 삶이 그리 불행하진 않은 것이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