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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Jul 30. 2024

책 판 돈으로 하와이 티켓을 산 소설가

오마이뉴스 게재, <비늘>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62] 임재희의 <비늘>


책에 밑줄을 치지 않는다. 밑줄뿐은 아니다. 메모를 하거나 귀퉁이를 접거나 아예 책을 상하게 할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책을 위해서가 아니다. 줄을 긋고 글자를 적고 귀퉁이를 접는 모든 행위는 책과의 교감이고, 그 교감은 곧 책에 내 마음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책에 마음을 잘 주려하지 않는다.


책을 판 일이 있다. 돈에 쪼들리던 대학생 시절, 돈 나올 곳 없었던 나는 책을 팔아서 필요한 돈을 마련했다. 책장 가득했던 아끼던 책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수중에 돈이 생길 때마다 한두 권씩 사서 모았던 그 많은 책들이 어느 날 이후 단 한 권도 남지 않게 돼 버렸다.


공들여 감상을 적고 좋은 구절을 표시하고 이런저런 메모들을 붙여두었던 아끼던 책들은 꼭 같은 이유로 헌책방에서보다는 좋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깨끗한 책보다도 좋은 메모가 붙은 책이라 산다던 그는 책을 아끼는 이가 분명할 터인데도 나는 좀처럼 헛헛한 마음을 메우기 어려웠다. 이후로 책에 어떤 표시도 하지 않게 된 건 어쩌면 그 시절 받은 상처가 깊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비늘 책 표지ⓒ 나무옆의자


책을 팔아 하와이로 간 소설가


임재희의 소설 <비늘>은 시작부터 책장을 비우는 이가 등장한다. 소설가 지망생인 오랜 연인이 소설가인 재경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면서다. 그녀는 이미 헌책의 단가를 알아본 뒤다. 집에서 돈이 되는 건 책뿐이라며 책을 팔아 반으로 나누자고 말한다. 돈이 되는 게 책뿐인 삶, 나는 그 삶을 아주 잘 알 것만 같아 책장을 넘기는 마음이 편치 않다. 재경은 가슴이 무너지지만 어찌할 수 없다. 사랑하는 그녀가 일터로 나간 뒤에 재경은 책을 팔 준비를 해나간다.


책이 얼마나 많았던 걸까. 재경은 책을 판돈으로 하와이로 떠난다. 그곳엔 그가 멘토로 삼았던 소설가 한동수가 있다. 저와 몇 살 터울의 동수를 그는 소설가를 양성하는 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강의를 나온 강사였고, 저는 학생이었다. 첫 소설로 등단했다는 동수의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는 그대로 사라지고 여럿이 어울려 술집으로 향했지만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했다. 동수가 더는 강사로 나오지 않게 된 어느 날, 재경은 그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냈다.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누르고 눌러쓴 메일 한 통이 오랜 시간을 두고 답장으로 돌아왔다.

 

등단하지 않은 채 소설을 쓴다는 행위는 관념에 지나지 않아요. 등단하고 책 내면, 김재경 씨가 소설가라는 것을,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힘으로 계속 쓰게 되지요. 그러니 등단해야 해요. 기쁜 소식 있으면 연락해요. 술 살게요. -42p


소설은 더는 소설을 쓰지 않게 된 한동수와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김재경, 하와이에서 만난 피터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동수는 형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동수는 더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설보다 더한 삶이 있다며, 제 소설이 더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가 소개하는 피터란 이는 노숙자로 살며 제가 과거 썼던 소설과 만든 영화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세상 모든 글이 저를 표절했다고 믿는 그와 세상에 내놓을 만한 글을 써낼 수가 없다고 굳어 버린 동수 앞에서 재경은 무명 소설가인 저를 돌아보기에 이른다.


소설가가 쓴 소설 이야기


스스로 소설가인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여러모로 흥미롭다. 글과 소설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가 작품 속에서 자연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소설을 그저 이야기를 넘어선 무엇으로 다루는 자세는 한동수와 김재경, 나아가 피터의 삶으로 옮겨가며 이어진다.


문학이 그저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단순한 즐길거리로 여겨지는 요즈음 세상에서 그 이상을 구하는 자세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만큼 작가가 마주하는 고통이 클 것도 자명한 일이다. 한동수와 김재경과 피터가 그러하듯 <비늘>의 작가 임재희도 그들이 마주한 고통의 한 조각쯤은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단하고도, 좋은 글을 써내고도 길을 잃기 십상인 이 구도적 예술가의 길 가운데서 어떻게든 다른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글을 쓰겠다는 작가의 자세가 소설 내내 읽히는 건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소설 막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재경을 데리고 피터가 어느 지하주차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와 재경은 피터만 아는 통로를 통해 도서관으로 오른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피터는 저의 걸작들을 하나씩 재경에게 소개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부터, 여러 걸작들을 하나씩 빼어들고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어쩌면 그 걸작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재경은 가만히 생각한다.


어쩌면 소설가가 진정 쓰고 싶은 작품이란 태평양을 가로질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제가 이런 책을 읽었노라고, 이런 작품을 쓰고 싶다고 소개하고 싶은 그런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글로 자극받고 글을 추앙하며 글에 베이고 글에 감동하는 인간이란 결국 이런 글 앞에 문을 열게 되는 법이니까. <비늘>은 꼭 그런 소설가의 마음이 담긴 책이었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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