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의 녹색 심장, 슬로베니아 시간의 결을 걷는 골프

by 여행하는 골퍼

알프스의 녹색 심장, 슬로베니아 시간의 결을 걷는 골프


낯선 나라에서 처음 날린 티샷은 단순히 공을 멀리 보내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 땅의 역사와 자연, 그리고 내 안의 고요함이 서로 맞닿는 순간이었다.



여정의 시작: 36시간을 기다리며 느낀 아날로그 감성


익숙한 홈 코스의 편안함을 뒤로하고, 낯설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의 티박스에 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곱씹어보면, 골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그 지역의 지질과 기후, 바람과 햇살을 몸으로 직접 느끼는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다. 슬로베니아로 향했던 이번 여행도 그것을 온전히 느끼기 위한 작은 시련이었다.


한국을 떠나 폴란드 바르샤바,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까지 오기까지, 항공편 결항이 겹치는 바람에 무려 36시간이나 걸렸다. 덕분에 바르샤바에서 보내게 된 하룻밤은 의외로 여행의 호흡을 한 번 더 고르는 시간이었다. 유럽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면서 마음을 차분히 다잡을 수 있어서, 오히려 그 시간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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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류블랴나로 향하는 비행기는 제트기가 아닌 예스러운 프로펠러기였다. 탑승구에서 마주한 큼직한 프로펠러와 이륙할 때의 진동, 커다란 소음에 잠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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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고도가 낮았던 덕분에 창밖으로 펼쳐진 알프스의 설산과 짙은 녹음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36시간의 기다림이 모두 이 장면을 위한 선물 같았다. 프로펠러 소음도 새로운 골프장에 대한 설렘 속에서 어딘지 낯설지만 즐거운 음악처럼 들렸다.



왜 하필 슬로베니아?


전 세계에는 이름난 골프 여행지가 셀 수 없이 많다. 이미 검증됐거나, 여행 상품으로 인기가 높은 곳도 수도 없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슬로베니아행 비행기에 올랐던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세계 골프 여행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행사인 IGTM이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전 세계의 골프장, 리조트, 호텔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 골퍼들이 가보고 싶을만한 곳에 대해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다. 나 역시 이런 흐름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서 먼 길을 택했다. 컨퍼런스 공식 일정은 예상보다 훨씬 숨가빴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미팅, 멈추지 않고 오고 가는 명함, 짧지만 밀도 있는 대화들로 하루가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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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진짜 의미 있는 순간은, 개최국의 주요 골프장에서 실제로 라운딩을 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문서나 브로셔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페어웨이의 질감, 그린의 스피드, 클럽하우스의 공기, 그리고 현지 사람들이 골프를 대하는 표정과 분위기까지. 그래서 슬로베니아의 골프장은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지가 되었다.



다이너스 쿠보: 고성과 전설을 가로지르는 첫 샷


류블랴나 공항에 내리자마자,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한 초록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땅의 절반이 숲이라는 슬로베니아답게 ‘글로벌 그린 데스티네이션’이란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공기조차 깨끗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첫 라운드는 공항에서 차로 10분 남짓 떨어진 스믈레드니크 마을의 다이너스 쿠보 골프 류블랴나에서 시작됐다. 2008년 문을 연 이 골프장은 현대적인 코스 설계와 넓고 시원한 페어웨이 덕분에 첫인상은 무척 편안했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매력은 구석구석 배어 있는 역사의 흔적에 있었다. 1번 홀 티박스에 서면, 언덕 위에서 골프장을 내려다보는 12세기 스믈레드니크 고성의 폐허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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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오스만 튀르크의 침입을 버텨낸 그 성벽이 이제는 시간에 잠긴 채 조용히 골퍼들의 샷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마다 붙은 이름도 재미있다. '남작의 꼬리'에선 옛 라자리니 남작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발부르가의 밤'에서는 중세 유럽의 신화가 자연스레 머릿속을 스친다. 페어웨이를 걸으며 내 발은 지금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어느새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알프스 산자락에 해가 기울 무렵, 근처 마을 성당에서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공적인 소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 골프공을 때리는 소리와 종소리가 어우러지던 그 순간이 참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때만큼은 골프가 점수를 겨루는 게임이라는 느낌보다는, 자연과 시간, 그리고 내 호흡이 하나로 이어지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 고요함 덕분에 36시간을 이동한 피로도 어느새 말끔히 씻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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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중의 에피소드: 국적을 넘어선 연대감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친선 골프 토너먼트가 열렸던 날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골프 관계자들이 한 팀을 이루었고, 나는 포르투갈 골프장 GM, 스페인 골프장 매니저, 체코 골프 매거진 기자와 한 조가 됐다. 경기는 베스트 플레이 방식으로 진행해 시작부터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남유럽 출신 골프장 매니저들의 스윙은 첫 티샷부터 남다른 실력을 보여줬다. 골프의 기본기가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큰 욕심내지 않고, 팀의 흐름을 살리기 위해 신중하게 플레이했다. 공이 난처한 위치에 떨어지면 안전하게 구해내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선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오히려 팀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많은 라운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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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40개 조 중에서 무려 10언더파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린 옆에서 샴페인 병을 터뜨리고, 우승 트로피까지 받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날의 승리는 단지 실력만으로 이룬 게 아니었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골프가 만들어준 특별한 연대감 덕분이었다. 그날 페어웨이 위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골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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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블레드: 왕이 거닐던 숲과 침묵의 미학


류블랴나에서 북서쪽으로 40분쯤 달리면 풍경이 한층 더 장엄해진다. 율리안 알프스의 산자락이 크게 펼쳐지고, 아래로는 에메랄드빛 블레드 호수가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바로 슬로베니아 골프의 상징, 로열 블레드 골프 코스다. 1937년,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데르 왕이 여름 별장 겸 골프장으로 만든 이곳은 첫인상부터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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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코스 첫 홀에 들어서면, 높고 깊은 침엽수림이 곧장 골퍼를 감싼다. 몇십 년, 아니 몇백 년도 넘었을 법한 거대한 가문비와 소나무가 페어웨이를 감싸고 있어서 마치 숲속 어딘가에 세워둔 조용한 성당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든다. 이곳을 걷다 보면 어느새 라운드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바뀐다. 부드럽고 촘촘한 잔디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온몸으로 대지의 기운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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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8번 홀은 이 코스의 백미다. 티박스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바로 그 너머로 오르막 페어웨이가 이어진다. 멀리에는 카라반케 산맥의 윤곽이 보인다. 정교한 샷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연을 경외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14번 홀에서는 잠시 클럽을 내려놓고 풍경에 빠져들고 싶어졌다. 높은 티박스에서 내려다보는 뷰는 아름답지만, 길게 이어진 워터 해저드는 왠지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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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리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왕들이 고민했을 나라의 운명이나, 내 삶에 엉켜 있던 고민들이나, 모두 이 웅장한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작은 일처럼 느껴졌다. 라운드를 마치고 나서는 1938년에 지어진 전통 양식의 킹스 하우스 테라스에 앉았다. 알프스 산자락에 물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현지 맥주 한 잔을 들이키니, 이태백의 싯귀처럼 < 별유천지 비인간 別有天地 非人間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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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드 호수의 전설: 종소리와 달콤한 위로


로열 블레드에서의 감동은 경기장을 떠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10분쯤 더 가면 만나는 블레드 호수는 슬로베니아의 낭만을 상징하는 곳이다. 한가운데 있는 블레드 섬으로 가기에 전통 나룻배 ‘플레트나’에 조심스럽게 올랐다.


사공이 노를 저어 나아갈 때마다 물살 가르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웠다.

섬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성모 승천 성당에는 ‘소원의 종’이라 불리는 큰 종이 걸려 있다. 99개의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면서, 전해지는 전설처럼 종을 세 번 울리면 소원이 이뤄진다기에 조심스럽게 종줄을 당겼다. 예전에 호수에 가라앉았다는 오래된 종의 사연이 손끝에 닿으며 전해지는 듯해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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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꼭대기에 자리한 성모 승천 성당에는 ‘소원의 종’이라 불리는 종이 조용히 매달려 있다. 99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면서, 전설처럼 종을 세 번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담아 천천히 종줄을 당겼다. 오래전 호수에 가라앉았다는 옛 종의 사연이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듯해, 그 순간이 깊이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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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호숫가 카페에 앉아, 블레드의 명물 ‘크렘슈니타’를 맛보았다.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과 바삭한 페이스트리가 어우러진 케이크 한 조각이, 여행 내내 쌓인 긴장을 달콤하게 녹여주었다. 맑고 에메랄드빛 호수 위를 고요하게 미끄러지는 백조를 바라보다 보면, 왜 이곳이 ‘제2의 에덴동산’이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류블랴나의 숨결: 시인과 건축가가 만든 도시


여정의 마지막, 수도 류블랴나의 구시가지를 천천히 걸었다. 이름처럼, 이 도시는 곳곳마다 사랑과 예술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다. 프레셰렌 광장 한복판에는 군인 대신 시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심지어 나라 이름에도 이 시인의 이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도시의 여러 장소에는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세 갈래로 이어진 ‘트리플 브리지’를 건너며, 건축이 사람과 공간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잇는지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붉은 벽돌과 돌을 자유롭게 쌓아 만든 도서관 건물은, 마치 지식도 멈춰 있는 틀이 아닌 살아 있는 흐름임을 말해주는 듯 보였다.


저녁이 찾아오자 슬로베니아 전통 음식인 ‘포티차’에 ‘츠비첵’ 와인을 곁들였다. 적포도와 청포도가 어우러져 산뜻한 산미를 자랑하는 츠비첵 와인은 밤공기와 참 잘 어울렸고, 고소한 포티차 한 조각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을 조용히 넘겨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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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낯선 땅에서 만나는 인생의 축소판


슬로베니아에서 보낸 며칠 동안, ‘좋은 골프 여행 상품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확신이 더욱 단단해졌다. 골프 여행의 참맛은 사진만으로는 절대 전해질 수 없다. 직접 그 길을 걷고, 직접 플레이하며, 그 나라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껴본 사람만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다가오는 골프 여행지였다. 화려함보다 깊이, 과장보다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여기에 유럽 특유의 안정된 코스 운영이 더해졌다. 이 여행은 단순한 출장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어떤 골프 여행을 소개해야 할지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알프스의 녹색 심장은 이렇게 내 골프 인생 속에 깊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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