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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Mar 21. 2021

혹시, 종교가?

'저는 모든 종교를 존중합니다.'

우리 어린이 친구, 아주머니 따라서 교회에 가지 않을래?
이번 주에 교회에 가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색연필도 줄텐데.


아줌마, 아줌마가 저 따라서 이번에 절에 가지 않을래요? 그러면 제가 색연필 드릴게요


아주 오래전 기억이라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6-7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동네에서 나를 포교하려던 낯선 아주머니와 나눈 대화인 것은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하고 있던 때라, 나와 아주머니의 대화를 듣고서는 친구들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엄마의 제안으로 절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보여 흐뭇해하는 엄마의 모습에 나는 그것이 내가 엄마를 기쁘게 하는 가장 쉬운 일이라 생각해 주말마다 절을 갔었던 것 같다.

* 만약 공부를 잘했더라면 공부가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데, 내가 살던 동네의 절(암자)은 큰 교회와 담 하나를 두고 바로 붙어 있었다. 교회를 가는, 또는 절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심지어, 주말 아침에 기도시간이 비슷했기에 불경을 외는 순간에 찬송가가 더 크게 울리기도 했다.

서로 경쟁하듯 더 크게 불경을 외거나,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그 소리는 서로에게 들렸다.


하지만 규모에 있어서나 신자의 수에 있어서나 2층으로 구성된 동네의 암자보다는, 높이가 5-6층 이상은 되어 보이는 교회가 훨씬 컸다. 차지하고 있는 땅의 크기도 5-6배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규모나 다른 이유 때문에 교회를 가볼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나에게 있어 절에 기도하러 간다는 것은 나뿐 만이 아니라 엄마를 흐뭇하게 하는 무엇이기도 했던 듯하다.






그날도 열심히 목탁을 치고, 또 소리 높여 불경을 외운 뒤였다.


나의 독실한(?)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절을 다니는 것이 즐겁게 보였는지, 그날 스님(비구니 스님/여성 스님)과 엄마가 절에서 나를 불러 앉혔다.


OO아, 너 방학 동안 절에서 저녁 예불을 스님과 함께 해보지 않을래?? 네가 절에 오늘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좀 더 기도도 드려보고, '천수경'도 하루 한 번씩 읊으면서 저녁 예불 시간을 스님과 함께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당시 1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누군가의 생애 첫 '제안'은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스카우트된'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실익과 힘들 것 등을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스카우트된' 듯한 느낌으로 '오케이'를 말해버렸다.


절을 다닌다고 해서 누구나 스님과 함께 저녁 예불을 올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치 내가 새로운 제안을 받고, 그 당시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특별한 활동은 맞았다. 누구나, 일반인이, 더구나 10살 조금 더 산 초등학생이 '스님처럼' 예불을 드리지는 않으니깐.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저녁 6시-6시 30분쯤에 시작해서 하루에 한 시간 30분 이상을 기도드렸던 것 같다.


요즘은 108배 절을 하는 것을 운동으로 여겨 많이들 한다지만,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108배와 천수경을 함께 했다. 매일 말이다.


한날은, 몸이 허했는지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어두운 날씨였고 그날따라 촛불도 희미했는데 그 희미함 사이로 숫자가 보였다. 숫자는 내가 절을 할 때마다 바뀌기도 하고 잠깐은 바뀌지 않기도 했었다.

절을 하면서 숫자가 바뀔 때마다 나는 겁이 났다. 이유도 모르는데 말이다.

법당 안의 어둑한 분위기와 그날의 날씨가 한몫했던 것도 있었겠지만, 절을 하면서 제발


'내가 잘 못 본 것이기를, 내 눈에 귀신이 보이는 것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이 기도만 받아주신다면, 저녁 예불을 더 열심히 다니겠다고.


알고 보니, 내가 볼 때마다 바뀌었던 그 숫자는 '디지털시계'였다.




'절을 하고 볼 때마다 변했던 숫자'


사건이 지나고 나서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투덜 되지 않으면서 저녁예불을 다니려 노력했다.


2달간의 방학이 왜 이렇게 긴지...

매일 저녁 예불을 다니느라 그 시간에 다른 것은 하지를 못했다.


내가 자랑할 수 있었던 건, '반야심경' 정도를 외우는 친구들에게 나는 '천수경'을 읽을 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 정도였다.

이것은 마치 '구구단'을 넘어 나는 '15단도 외울 수 있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살면서 구구단만 할 줄 알아도 계산하는데 지장이 없고, 요즈음에는 계산기가 있으니 외울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그때 당시 나는 몇 안 되는 '천수경 자부심'을 가진 10대 초반의 초등학생이었다.


어쨌든, 다소 길게 느껴졌던 나의 초등생활 방학이 끝날 때쯤엔,

그 당시 기억을 다시 해보면, 솔직히 말해서 방학이 끝난 아쉬움보다 저녁 예불을 '어쩔 수 없이' 끝마쳐야 된다는 생각에 더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나의 기쁨을 살짝은 숨기며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저 이제 방학도 끝나고 학교도 다시 다녀야 해서 저녁예불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는 5시 전에 끝나니, 그 후에 오라거나 또는 나를 위해 저녁예불 시간을 늦춰서 같이 하자라고 제안했다면 준비가 안된 나는 궁지에 몰렸을 것 같아, 생각만 해도 당황스럽다.


다행히, 스님께 나의 존재는 크지 않았던지, 아니면 나의 고충을 이미 꿰뚫고 계셨던지,


그래, 기도하느라 힘들었지. 공부 열심히 하자.


라고 하시며, 나와 그날 마지막 저녁 예불을 준비하셨다.




그날 이후로, 절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 공부니, 늦게 귀가했느니, 주말에 친구를 만나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절에 기도를 드리러 가보지 않은 게 5년, 10년이 지나 20년도 넘은 것 같다.


어쩌면, 절을 다니는 게 '엄마를 흐뭇하게 하는 것'이라는 어릴 적 생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이 더 나에게 중요함을 알고 나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나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스스럼없이 '불교'라고 답했겠지만,
이후로 누군가 나에게 종교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나는 '없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 이 역시도 어릴 적 독실한 믿음을 가졌던 나에서, 어느 순간 기도를 드리지 않았던 나였기에 자신 있게 '신자'라는 표현을 쓸 자신이 없었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이 '없습니다'라는 말도 해외에서는 다르게 말한다.
'저는 모든 종교를 존중합니다.'
해외에서는 몇몇 나라의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무신론'에 대해 비판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가 없다고 말하기보다, 신은 있기에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게 대화를 비켜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라오스는 불교를 믿는 인구가 많은 국가로 곳곳에 사원이 있다.


비록 한국의 대승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라오스가 다르지만 말이다.


어릴 적, 어떤 이유와 목적도 없이 순수하게 종교를 믿었던 내가 대단했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목적'과 '바라는 것' 이 있어야만, '순간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나이기에 말이다.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서인지,

나름대로의 위로와 편한 생각으로 라오스의 사원을 지날 때면, 어릴 적 한 번씩 어릴 적 합장하며 기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잠시 숙여 기도한다.


순수했던 어릴 적 기도만큼 열정적이지 않을진 모른다.

살아가면서 '목적'과 '이유'와 '이윤'을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바라면서 기도한다.

욕심이 이뤄질지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하는 것이 기도니깐.


건강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모든 것이 무사하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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