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에서의 삶
2025년은 제게 가장 특별한 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예산의 이야기로 만든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지역 축제에 참여하면서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특별한 결혼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작년 한 해를 회고하며 제가 예산에 내려와 느낀 것들을 기록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로컬의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깊이’를 얻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속도가 곧 경쟁력이었다면, 예산에서는 천천히 쌓는 신뢰와 관계가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역의 이야기를 다루는 일 역시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역사를 공부하고, 공간과 주민의 이야기를 꾸준히 수집하는 과정에서 매력적인 콘텐츠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원도심 도보 여행 코스를 기획하면서도 느림의 가치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 그대로 멈춘 듯한 원도심에는 천천히 걸어야만 보이는 예산의 매력이 있습니다. 골목의 정취를 따라 걸으며 주민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추사체로 제작된 간판에서 출발해 오래된 거리로 시선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지역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한 충청도 사투리에서도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유의 여유가 느껴지는 해학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느리지만 부드럽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충청도 사람들의 정은 한순간에 알아채기 힘든 문화입니다. 천천히 관계 맺으며 스며들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온도. 그것이야말로 도시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지역 고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로컬에서의 삶은 ‘함께하는 것’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과 어우러져 축제를 만들고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주민 참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협력과 참여가 없었다면 빈집을 고쳐 영화제를 열 수도 없었고,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참여형 콘텐츠는 실행할 용기도 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협업의 어려움도 느꼈지만, 그럼에도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컬에서의 삶과 결혼을 주제로 한 저희의 전시 역시 지역 선배님들의 넉넉한 배려 없이는 시작조차 어려웠을 프로젝트였습니다. 예산에서 만나 지역에 터를 잡은 저희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분들 덕분에 공간 구성부터 전시에 필요한 작은 오브제 하나까지, 여러 손의 정성이 더해졌습니다. 그야말로 예산이 맺어준, 예산과 함께하는 전시였습니다.
세 번째는 로컬의 가능성은 누군가가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구소멸 위험지역으로 분류되는 예산에서 관광과 문화예술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걱정과 의심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예산에서 그게 되겠냐”, “예산 이야기를 누가 재미있어 하겠냐”라는 말 앞에서 솔직히 작아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과 일을 만들고 방향성을 다듬는 과정에서 가장 지역적인 이야기가 가장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바뀌는 순간, 예산은 그저 그런 무채색의 공간이 아니라 재밌는 이야기로 가득한 ‘기회의 땅’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예산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올해는 ‘가야산 아래 평평한 마을’에서 펼치는 ‘제1회 논두렁 러닝’, 가족과 함께 즐기는 ‘지역 체험형 아동극’, 그리고 예산 보부상 대길과 주모 능금이 전하는 충청도 새참 한 상 ‘새참극장’까지, 벌써 머릿속에 기획안이 가득합니다.
예산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기회의 땅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의 경쟁력은 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산이라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모으고, 결합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풀어낸 2025년을 돌아보니, 역시 고향에 돌아오길 잘했다는 확신이 듭니다. 관심과 응원을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6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