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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롱 Mar 27. 2021

고양이 키우지 마세요.

누가 요물 소리를 내었는가? 누구인가?




최근 들어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소비를 좀 줄여보고자, 또 생각 없이 돈을 쓰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좀 주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00일.

점심 - 9,000원

간식 - 3,000원

고양이 간식 값 - 18,000원 (...?)


00일.

점심 - 6,500원

커피 - 4,000원

시장용 장바구니 - 3,000원

고양이 스크래쳐 - 40,000원 (...??)


(주말) 00일.

마스크 구매 - 28,000원

고양이 사료 - 38,000원 (?)

고양이 모래 - 45,000원 (?!?!)


00일.

점심 - 8,000원

간식 - 3,800원

커피 - 3,500원

고양이 간식 + 장난감 - 88,600원 (... 허..)

고양이 실리콘 칫솔 - 27,000원 (.....!)





하... 귀여워..... 집에 가면 뽀뽀해 줘야지.....




다시 봐도 헛웃음만 난다. 이게 과연 인간을 위한 가계부인지, 고양이를 위한 가계부인 지 도통 분간이 안 가기 시작했다.










최근 집에 있는 시간들이 늘어나다 보니,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나에게 많이들 묻는다. 고양이랑 같이 사는 건 어떻냐고. 나도 고양이를 키워볼까 한다고. 나는 언제나, 늘, 모두에게 똑같이 대답한다.



"고양이 키우지 마."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들어. 사료, 모래, 장난감에 동물들 보험 안 되는 거 알지? 병원 가서 엑스레이 찍고 진찰 한 번 받는데 돈 십만 원은 우습게 나가. 게다가 고양이는 가방에 넣고 내가 모셔다 드려야 해서 얼마나 힘든 줄 아니? 봄가을은 그나마 낫지, 여름 겨울엔 사람 죽어난다, 너.


털은 또 어떻고. 그냥 많이 빠진다 수준이 아니야. 난 죽어서도 시체에서 고양이 털이 나올 걸? 사람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지? 고양이는 숨만 쉬어도 털이 빠져. 짧다고 안 빠지는 게 아냐. 짧은 애들은 털이 이불이랑 옷에 박혀. 돌돌이로 잘 떼어지지도 않아. 긴 애들은 먼지 공처럼 뭉쳐서 바닥에 굴러다니고.


아, 이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예쁜 이불 살 생각은 아예 접었어, 나는. 지금 쓰는 건 알레르기 프리라고 비닐처럼 바스락 소리가 나는 건데 털이 안 묻어서 써. 디자인 되게 촌스러운데 그냥 써. 그게 방수도 돼서 애들 화장실 갔다가 막 올라와도 물티슈로 닦아낼 수 있거든. 고양이라고 다 깔끔한 게 아냐. 지 돈고 관리 못하는 애들 얼마나 많은데.


비싼 쇼파, 커튼 꿈도 꾸지 마. 발톱질 안 하는 애들이랑 살아도 그 털들이 털들이. 아휴, 감당 못한다 너. 나 원래 비염 없던 인간인 거 알지? 언제부턴가 음식만 먹으면 콧물 줄줄 흘리잖아. 그게 다 비염이래. 요즘은 또 마스크 쓰고 나가면 얼마나 가려운 줄 아냐? 마스크 속에 분명히 고양이 털이 붙었어. 근데 안 보여. 안 떼져. 그거 진짜 사람 미친다니까?


마스크뿐이게? 옷도 그래. 검은 옷 돌돌이로 암만 밀고 나와봐라. 밝은 데서 보면 얼룩덜룩 다 애들 털이야. 세탁기 돌려도 안 떼지더라.


그리고 신데렐라처럼 살아야 돼. 아무리 가족들이랑 같이 산다고 해도, 실질적인 집사는 너잖아. 퇴근하고 학원도 안 다니고, 약속도 안 잡은 지 꽤 됐어. 어쩌다 한 번 늦게 들어가도 집 가서 빌어야 돼. 미안해, 기다렸어? 내일은 일찍 들어올게~. 걔네 얼마나 영리한 지 늦으면 기분 언짢은 거 다 티 내더라.


어릴 때부터 관리 안 해주면 병원비로 큰돈 들어가니까 귀 청소도 해줘야 하고, 발톱 관리, 이빨 청소 (고양이 이 닦이는 거 지옥이야. 장난 같지? 나도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야.), 하루하루 털 빗어주기 (안 빗어주면 헤어볼 생겨서 자주 토해. 이불 위에 토하면 퇴근하고 와서 그대로 기절하고 싶어 진다니까. 그 냄새며 빨래며.), 때마다 목욕시켜주기 (하... 목욕... 최종 보스...), 매일 화장실 청소, 물그릇 밥그릇 세척, 영양제 챙겨주기... 이것만 해도 기절해. 퇴근하고 뭘 해본 게 언제인 지 까마득하다, 까마득해.




"그래도, 이런 거 저런 거 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감수할 수 있다면 같이 살아 봐."




아마 네 세상이 달라질 걸.










밀린 가계부를 모두 작성하고, 나는 고양이 적금 하나를 들었다. (따로 상품이 있는 건 아니고, 일반 적금인데 이름을 고양이 적금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가다간 캣타워와 함께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여전히 내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은 내 수준에 맞게, 개 중에서도 그나마 나은 것을 골라 사주겠지만, 이제 슬슬 중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고양이를 위해 노후 대책(!)도 세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동물들은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큰돈이 나가는 건 순식간이니까.



나는 여전히 지인들에게 고양이를 키우지 말라고 말한다. 해마다 돈 때문에 버려지는 동물들이 너무 많다. 털 때문에, 아이를 가질 거라서, 집 안 가구가 소중해서, 내 시간이 소중해서. 자꾸만 길거리로 내몰리는 동물들이 너무나도 많다.


지인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돈과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믿지 못할 뿐이다. 선택은 순간이나, 책임은 평생 갈 것이다. 무시무시한 으름장에도 눈을 빛내며 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사람들에겐, 내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보여준다.




"보여요? 지금 내 휴대폰 갤러리에는 고양이 사진이 삼천장 있고요, 사진 드라이브에는 육천 장이 더 있어요. 근데도 순간순간이 너무 아쉬워요. 그때의 내 감정과 내 고양이의 움직임을 담지 못해 안달이 나요. 나를 좀 더 졸라매고, 노력하면 만 번의 행복이 찾아와요."




아니, 찍지 못한 순간들이 더 많으니까 만 번이 뭐야. 몇 억 의 조각들이 행복이란 이름으로 뭉쳐져요.

그게 고양이예요. 강아지고, 우리랑 같이 사는 동물들의 존재예요.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그 털 뭉치들로 견뎌낼 수 있어요.




그래도 고양이 키우지 마세요.

당신이 온 세상의 전부인 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고양이 키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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