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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롱 Mar 26. 2021

잊지 마, 넌 흐린 어둠 사이.

왼손으로 그린 별 하나.




서른.

나는 올해 서른이 되었다. 10년 전쯤 서른이 되면 해야 할 버킷 리스트 같은 걸 적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대충 기억해 보자면,



1. 세계일주 하기. (이 시국이란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2. 전국일주 하기. (서울, 부산. 딱 두 도시 가봤네요. 갑작스러운 현타...)

3. 자격증 5개 보유하기. (저에겐 아직 4번의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4. 차 사기 - SUV (홍차는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5. 독립하기. (... 행복 주택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6. 회사 세우기. (10년 전의 저는 미쳤던 걸까요?)

7. 소설책 쓰기. (그나마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던 일들. 나는 하나도 지키지 못한 채 서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살 땐 참 꿈도 많고 미래에 바라는 것도 많았구나 싶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떻지. 

점점 더 멀어지는 스무 살의 나를 향해 손조차 흔들 수 없는 서른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지?










무기력에 지지 말자.

요즘 들어 수 없이 되뇐 멘트다. 그리고 어제의 나는 또 무기력에 잠식 당해 버렸지. 퇴근 후 집에 들어갔는데 밥이고 뭐고 그저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간신히 샤워를 마치고, 또 고양이 밥은 거르면 안 되니까 밥과 화장실을 챙겨준 후 그대로 뻗어 버렸다. 낚싯대를 좀 흔들어 줘야 하는데. 늦어도 브런치에 글 하나는 올리고 자야 하는데. 생각만 들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이대로 먼지처럼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죽은 이후에 아무도 고생하지 않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그랬으면. 전형적인 INFP 답게 혼자 땅굴을 파다가 문득 책상 위 달력에 눈길이 갔다. 벌써 2021년의 3월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아, 안된다. 더 이상 우울해지면 안 돼! 



근데 시간이 이렇게 흐를 동안 나는 대체 뭘 한 거야?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정신도 피폐하고. 뭐 하나 제대로 마무리된 게 없는 하루였다. 


다른 사람들은, 내 또래들은 잘만 살던데.

인터넷 세상은 믿을 수 없다지만, 그렇지 않은가. 최근 들어 불었던 주식 열풍에 탑승해 큰 수익을 낸 사람도 있었고, 파이어족이니, 파이프족이니 신조어에 걸맞게 착실히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도 있었고, 서른. 늦지 않았어! 멋지게 외치며 새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데 내 서른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방황했다. 의지만 있다면 발이라도 얹어 보겠는데. 이도 저도 아니고. 아직도 한심하게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따위나 한다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같이 잠을 자기 위해 침대로 올라온 내 고양이가 잠시 내 상태를 살피다, 풀썩 몸을 기대 온다. 그래, 걱정 마. 누나가 사라져도 너 먹을 사료는 푸짐하게 사놓고 갈게. 작게 속삭이니 귀여운 고양이는 고롱거리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참 특별할 것 없는 새벽녘이었다. 


아니 한심한 새벽녘이었지. 나는 우물이 될 자리도 아닌 곳을 열심히 파며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이지 밤을 꼴딱 새우고 출근을 하겠어! 이따위로 살면 밥만 먹는 식충이와 다른 게 무엇인가 까지 생각이 닿자 더듬더듬 손을 뻗어 이어폰을 귀에 꼈다. 잔잔한 노래라도 들으며 억지로라도 잠에 들 요령이었다.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나는 킁킁 거리며 입술을 삐죽일 수밖에 없었다.










청춘을 위로하는 노래들이 얼마나 많던가.

제목 자체가 청춘인 곡 또 한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내 심금을 울린 건 '청춘'이 아니라 '셀러브리티'였다. (이 단어의 뜻도 내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았는데도.)





잊지 마, 넌 흐린 어둠 사이. 왼손으로 그린 별 하나.

잊지 마, 이 오랜 겨울 사이. 언 틈으로 피울 꽃 하나.

보이니. 하루 뒤 봄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말이야.





노래를 듣고 운다고?

(가수를 꿈꿨던 주제에 감수성은 오지게 없어서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말이 돼? 


그리고 그것을 제가 해냈습니다. 

나는 고양이 앞발을 잡고 흑, 큽 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단어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어 늪에 빠진 내 뒷덜미를 낚아채는 것 같았다. 올라와. 이제 그만 올라오라고! 도르륵 감기는 도르래를 따라 나는 천천히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세상에 나는 나 밖에 없어도 나와 비슷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남들이 말하는 빛나는 청춘이 되지 못해 우울한 사람도 분명히, 이 지구 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청춘이 좋다. 좋을 때다. 청춘엔 뭐든지 도전해 봐야 해. 청춘은, 청춘이란 것은. 얹어지는 말들에 하늘조차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인 이 시대의 진정한 청춘들이. 또 어느 날의 새벽, 나처럼 울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보며 그래, 내가 낫지. 그러니까 힘내자! 따위의 저열한 자기 위로를 하자는 게 아니다. 청춘은 나만 아프고 무거운 것이 아니니까.


오직 나만 문제아고, 오직 나만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거다. 누구에게나 삶은 버겁다. 좀 푸릇하다고 삶이 가벼워 질리도 없지 않은가. 


삐죽한 세상의 모서리에 서 있더라도. 어떤 도형이든 모서리가 없인 그저 선 밖에 되지 못한다는 걸 명심하며. 오늘은 절대 무기력에 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지지 마세요. 조패세요, 무기력을 그냥!




우리 존재, 모두 화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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