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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롱 Apr 15. 2021

칭찬받을 용기

조금 더 뻔뻔하게 나를 사랑하기



고롱씨, 바지 진짜 잘 어울린다. 다리가 길어 보여요~


갑작스럽게 날아든 칭찬에 텀블러를 헹구다 말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쵸. 이 바지 예쁘죠? 요즘 세일 기간이라 산 건데, 생각보다 짱짱하고 좋더라고요. 어디서 샀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따위의 수많은 대답 후보 중 내 입에서 튀어나간 말은,




"아니에요. 저 다리 짧아요. 그냥 키가 커서 그래요."




뜬금없는 자기부정이었다.











누군가 듣는다면 칭찬받는데 무슨 용기씩이나? 하며 놀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죽겠는데. 어릴 적부터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던 어린이는 꾸역꾸역 자라 칭찬을 거부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 모든 건 불우한 어린 시절 탓이다.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싶다만, 어느 정도 내 탓 또 한 있을 것이다.


살면서 어떤 일에 도전하고 성공해 본 일이 몇 번이나 있던가. 물론 모두가 실패하며 자란다. 수백 번 넘어지고, 수천번 중심을 잃으며 완벽한 이족보행을 하겠지. 근데 그 과정을 견디질 못하고 성질 머리만 케이 한국인이 되어 버린 나는 한 번 실패한 일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렇다 보니 기억 속엔 도전과 실패만이 가득 차 버렸고, 종국엔 도전 이란 단어 역시 지워지고 실패만 가득 남아 있더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빡빡하게 구니, 자존감이란 자존감은 혼자 다 까먹었다. 그래서일까. 너 이거 잘하는구나? 하는 칭찬을 들으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잘 못하는 거 아는데 왜 저러는 거지? 비꼬는 건가? 놀리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을 다한다. 그러다 문득 그 부정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툭 치면 자동으로 북을 치는 장난감처럼, 툭 칭찬 한 마디 하면 열 마디의 부정이 쏟아져 내린다.








한 번은 아이패드 드로잉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패드 어플을 사용해 그림 스케치를 배우는 과정이었는데,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고롱씨는 왜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예상 못한 질문이라 잠시 고민했다. 그냥. 그냥 배워보고 싶어서 배우러 온 건데. 그런데 선생님이 물어본 건 굳이 도화지가 아닌 왜 '아이패드'로 그림을 배우고 싶냐는 질문이었으니까, 나는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쉬워서요. 도화지는 그리다 안 되면 어쩔 줄을 모르겠거든요? 지우개가 있어도 지우다 보면 잘 그린 부분까지 어색해지잖아요. 근데 아이패드는 그리고 지우는 게 쉽기도 하고, 새로 시작하기도 좋고요."


"편리해서?"


"네. 편리해서. 그리고 사실 예전에 진짜 미술 학원을 다닌 적이 있거든요. 입시생들이 다니는 학원이요. 갔는데 넓은 도화지에 선 그리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일주일 동안 선을 긋고, 원을 그리고, 사각형을 그리다 보니까 너무 지루했어요. 그래서 그 길로 그만뒀어요. 근데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고, 아이패드로 그리는 건 그런 과정을 안 거치고 사진 그대로 선 따기도 쉬울 것 같고. 그런 이유도 있고요."




선생님은 내 대답에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신나게 화면을 터치하다 물끄러미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고롱씨 말도 어느 정도는 맞아요. 아이패드 드로잉 수업이 인기가 있는 것도 접근하기 쉽고, 단기간에 원하는 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거든요. 근데, 고롱씨가 말했던 그 지루한 과정은 아이패드에도 필요해요.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건 결국 따라 그리는 것 밖엔 못하거든요.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걸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매끄러워지려면 기초가 있어야 해요. 클래스 자체가 비싸기도 하고, 단기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린 그 과정을 과감히 뒤로 미뤄버린 것 밖엔 안돼요."


"그런가요?"


"네, 그렇죠. 언젠가는 그 과정을 다 해야 해요. 근데 또 관심도 받고, 클래스도 잘 되려면 눈길을 사로잡는 광고 문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스케치 완성! 드로잉 완성! 하고 홍보를 하는 거죠."




기초가 있어야 어딜 가도 자신 있게 그림을 소개할 수 있어요. 지금은 제법 사진을 잘 따라 하시는 분들도 그림 참 잘 그리시네요, 하면 사진을 따라 그린 것 밖엔 안돼요,라고 많이 말하시거든요. 어떻게 선을 그리고, 빛이 어디로 쏟아지고, 어떤 부분을 어둡게 그리는 것인 지 알게 되면 조금 더 당당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패드로 그렸던 기초 그림.... 이걸 그린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예를 들면, 그림 참 잘 그리시네요 란 칭찬에 감사함을 표하며 이건 어떤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내지는 제가 상상한 어떤 인물의 초상화예요! 하고 내 그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에는 이런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결국 자존감의 유무도 기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가장 기초.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바지 칭찬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내가 좋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예쁘지도 잘생기지도 않았다. 다리는 길지 않고, 그저 멀대같이 키만 크다고 생각해 왔다. 언제부턴가 거울을 보면 단점을 짚어내기 바빠졌다.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 있더라. 자꾸 나의 모자란 부분만 확대 해석하고, 못난 곳은 더 못나 보이며 그나마 나은 곳은 왜 더 예쁘지 않을까 엉엉 떼만 쓰고 있더라.


나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치마보단 바지가 더 잘 어울리고. 얼굴이 동그랗지만 조금은 어려 보여. 나는 집중하며 책 읽기도 잘하고, 어떻게든 맡은 바 책임을 다 해 일하려고 노력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지.

(하... 이 두 줄 쓰는데도 스스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나에게 자신이 없어서. 이 칭찬이 정말 내 칭찬이 맞는 걸까 확신이 없어서.)


평소의 나를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감사합니다. ㅇㅇ씨도 오늘 입은 옷 정말 잘 어울려요!"




라고 위트 있게 받아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물어물 그런 게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다 싸해지는 분위기를 느끼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물론 이 모든 이론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사랑의 기초 중에 기초.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하기. 그러다 보면 예고 없이 날아오는 칭찬에도 웃으며 브이를 그려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아이패드 드로잉 수업은 비용과 이 시국 문제로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언젠가 다시 선생님을 만나러 가면 꼭 말해봐야겠다.




"선생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도화지에 선 긋는 방법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초 중에 기초!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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