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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Aug 18. 2024

누군가는 누군가의 똥을 치워야 한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살려줘요….”

라인 구석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린다. 테스트 라인은 대략 2m 높이의 장비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정렬되어 있다. 장비의 대수가 어림잡아서 100대는 되어 보인다. 장비의 크기는 배터리 공정 장비의 크기보다는 작고 단순해 보였다. 장비의 모양은 모두 직사각형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장비 뒤에는 PC가 있어서 마치 거대한 서버와 개인용 PC가 연결된 모습이다. 특이하게 자재를 자동으로 이동시켜 주는 운송 장치가 없다. 현장 여사원들이 카트로 직접 자재를 나르고 있는 모습이다. 현장 여사원들은 빵모자에 흰색 가운과 흰 바지를 입었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입고 있다. 생산부 현장보다는 매우 평화롭고 편안한 모습이다. 그 속 어딘가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천천히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현진영 대리가 혼자 앉아서 어떤 제품을 수북이 산처럼 쌓아놓고 정리를 하고 있다.

“살려줘요…. 에? 팔봉이인 줄 알고 장난친 건데 철수님이군요. 오신 김에 저 이것 좀 도와주실래요?”

긴급한 듯 불러놓고 그냥 잡무를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장난은 이런 것인가 보다. 일단은 피할 방법이 없기에 대답을 하고 바닥에 앉았다. 라인의 맨바닥에 앉는다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현진영도 바닥에 앉아버린 상태라서 마음을 비우고 앉아버렸다. 현진영, 그는 테스트 팀에서 소문난 일 중독자다. 늘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말하면서, 본인의 단점을 시간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늘 머리를 긁적이며 다녀서 그런지 30대 초반에 벌써 탈모가 심해 보인다.


그는 배터리 완제품을 손으로 집어서 어떤 틀에 합치고 있었다. 전자제품 속 기판에 붙어있는 검은색 사각형의 손톱만 한 물체를 배터리 제품, 줄여서 그냥 완제품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배터리 소자라고 부른다. 그 작은 손톱만 한 검은색 물체 안에 생산부에서 생산했던 원자재 조각이 손톱보다도 더 작게 잘라져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만들어주는 곳이 제품 그룹이다. 만들어진 완제품을 테스트하는 곳이 바로 여기 테스트 그룹이다. 그 손톱만 한 완제품은 마치 달걀을 담는 달걀 트레이와 똑같이 완제품 트레이라는 곳에 담아서 이동, 보관한다. 그것을 다시 포장해서 트레이에 담긴 채로 고객에게 판매한다. 한 트레이에는 제품이 대략 10개는 담겨있다. 트레이는 달걀 트레이를 탑으로 쌓아두듯 10개, 20개 쌓을 수 있다. 지금 만지는 완제품은 모두 불량품이다. 자세히 보니 트레이에 10개를 넣을 수 있는데 모든 불량품이 10개씩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트레이에는 불량품이 한두 개 들어있다.

“아. 철수님 완제품 처음 보시죠? 이게 완제품이에요. 이 검은 쪼가리 속에 철수님이 만드셨던 원자재 조각이 들어가 있어요.”

현진영은 본인의 지식을 뽐내는 듯이 말했다.

“이놈들이 보통 트레이에 제품이 가득 차 있으면 좋겠지만 테스트하고 양품 빠지고 실험 제품 빠지고 불량 제품 따로 빠지고 등등하면 트레이에 빈자리가 많이 생기거든요. 그거 수작업으로 합치는 일이에요.”

그가 계속 말했다. 옆에는 그 불량품들이 산처럼 쌓여있었고, 트레이들은 탑처럼 쌓여있었다. 참으로 무식한 일이다.

“이거 자동으로 합쳐주는 장비 없어요?”

난 그에게 물었다. 그가 말하길 그런 장비는 있지만 아무도 사용해 본 경험이 없다고 말했다. 생산부로부터 장비를 대여해야 하고 장비 사용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번거롭고 어려울 수 있어서 늘 이렇게 인형 눈알을 붙이듯 무식하게 세월아 네월아 하며 손으로 종일 한다는 것이다. 희한하게 여기는 엔지니어와 제조 현장의 사이가 매끄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누구도 서로 인사를 안 한다. 아무튼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작업은 너무 무식한 작업이다. 이 정도 수량이면 혼자 하려면 한 시간은 걸릴 양이다. 어쨌든 그를 도와서 손으로 트레이를 정리했다. 이날 이후로 트레이 합치는 작업을 수도 없이 했다. 대부분 현진영 대리와 함께했는데 어떤 날은 김팔봉 사원과 했다. 김팔봉 사원과는 마음이 잘 맞아서 금방 친해졌다. 그의 외모는 밤식빵처럼 선 굵은 인상으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막상 경험해 보니 카스테라처럼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남자 후배였다. 게다가 김팔봉 사원은 쌥쌥이처럼 조금 요령을 부리고 싶어 하는 후배였다.


“팔봉아, 안 되겠다. 우리 이거 장비 빌려서 해보자.”

“저는 선배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가끔 그의 대답은 인공지능 로봇 같다. 제조팀에게서는 생각보다 장비를 금방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간단한 사용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생산부에서 만지던 장비에 비하면 쉬운 장비다. 배운 방법대로 트레이를 올리고 바로 실행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 철컥]

로봇으로 구성된 핸들러는 빠른 속도로 제품을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팔봉아 우리 커피 한잔하고 오면 끝나있겠는데?”

“와우, 멋져요. 커피 한잔하러 가시죠.”

김팔봉과 나는 배터리회사의 생산본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생산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도 못 하고 있다. 나 역시도 지금 테스트 그룹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 두 개의 거대한 본부는 그냥 다른 회사라고 봐도 상관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문화와 전혀 다른 고유 업무를 갖고 있었다.

[띠리리링]

“네…. 또 보내시나요? 쩝…. 알겠습니다.”

김팔봉이 벨 소리가 울리는 전화를 받더니 또 올 게 왔다는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부천공장 고객 만족 팀에서 RMA를 보냈다고 하네요. 제가 그거 받아서 테스트하는 담당자라서 받아서 오늘까지 돌려야 해요. 일찍 퇴근하고 싶었는데 망했네요.”

김팔봉 사원은 RMA라고 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RMA에 대해서 한 30분을 설명하며 하소연했다. RMA라는 것은 Return Merchandise Authorization, 즉 제품 반송 승인 서비스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고객에게 이미 판매한 제품에 대해서 무상으로 불량 확인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고객 처지에서는 보증기간 안에 불량이 발생하면 무상 지원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 하지만 김팔봉 사원이 맡은 제품은 보증기간이 10년이다. 본인이 회사에 없을 때 불량을 초래했던 원인까지 찾아서 검증해야 한다. 고객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현장 입장에서는 영업부가 10년 전에 이렇게 계약해 버린 바람에 생겨버린 탐탁지 않은 업무다. 특히 본인이 입사하기 수년 전 제품까지도 받아서 검증해야 하는 김팔봉 사원에게는 답답할 노릇이다. 김팔봉이는 갑자기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급한 일이 생긴 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들어온 그의 손에는 제품이 한 개 들려있다. 보아하니 연식이 좀 있어 보이는 제품이다.

“철수 선배님. 이게 RMA 제품이에요. RMA는 TAT(Turn around time, 반환시간)가 하루이기 때문에 되도록 오늘 안에 테스트 돌려보고 반납해야 해요. 별일이 없다면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해요.”

김팔봉 사원은 뭔가 쫓기듯 말했다. 김팔봉이는 RMA 검증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구석으로 갔다.

“제조에서 장비 겨우 빌렸어요. 이 제품 패키지 형태가구형이라서 테스트 보드와 소켓을 맞춰둔 장비가…. 여기 이 장비 두 대뿐이거든요..”

그는 내게 간략히 배경 설명을 해주며 제품을 장비에 넣으려고 준비했다. 이 RMA 제품은 닌텐도(Nintendo)라는 유명한 일본 게임회사에서 왔다고 한다. 게임기는 어차피 외부 전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용량이 큰 배터리까지는 필요 없어서 이렇게 오래된 배터리 완제품으로 원가 절감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테스트 장비는 저온 장비와 고온 장비가 있었다.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두 가지 온도 조건을 모두 테스트해줘야 한다고 한다. 그는 장비에 제품을 넣고 키보드를 매우 빠른 속도로 타이핑한 뒤에 테스트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제 불량 재현이 안 되면 끝이고 재현되면 소자팀으로 보내야 해요.”

대부분의 불량은 재현이 안 된다고 한다. 일반적인 전자제품에는 워낙 많은 부품이 들어가기 때문에 고객사에서 테스트할 때 다른 부분이 문제를 만들었을 수 있다고 한다. 또는 드문 확률이지만 불량 현상이 사라지는 일도 있다고 한다. 제품이 스스로 힐링되었다고 한다.

“사실 제가 바쁘거나 귀찮을 때는 테스트를 해보지 않고 그냥 불량 재현 안 되었다고 종료시킬 때도 있다는 것은 안 비밀입니다.”

김팔봉이는 내게 농담도 건네며 비밀도 이야기해 주었다.


“철수 사원, 김팔봉 사원 여기로 와봐. 잠깐 얘기 좀 합시다.”

변진섭 차장이 우리 둘을 불렀다.

“네, 파트장님.”

“네.”

“팔봉이가 지금 일이 몰리고 있어서. 업무분장 좀 하려고. 철수 이제 RMA 정도는 혼자 잘한다며?”

“네…. 뭐….”

“그래. 팔봉이 하는 것 중에 그럼 RMA 하는 거는 철수 사원에게 넘기고, 팔봉이는 신제품 설정하는 거에 집중해. 되었냐?”

얼마 지나지 않아 김팔봉 사원은 RMA 처리와 더불어 담당 신제품 구축이라는 업무로 바빴다. 듣기로는 지저분한 업무다. 일반적으로 테스트 장비에서는 10개 제품을 동시에 테스트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을 두 배로 늘려서 한 번에 20개를 테스트할 수 있도록 바꾸는 작업이다. 테스트 시간이 1.3배에서 1.5배 늘어나지만, 장비 하나로 두 배의 물량을 진행할 수 있어서 결론은 테스트 제조팀에서 좋아한다. 이게 처음에는 누군가의 생각으로 한번 만들어 본 것인데 이제는 신제품이 들어와 양산 이관을 하면 양산 과정에서 당연하게 해야 하는 절차가 되었다. 문제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그저 그런 설정이 아니다. 수천, 수만 줄의 코드를 해석하며, 한 달, 두 달, 길면 석 달을 한 땀 한 땀 프로그램 코딩을 해야 한다. 아무 문제도 없다면 다행이지만 최대한 검증을 해도 테스트 사고가 난 적이 있다. 특정 아이템을 잘못 테스트했다거나 제품을 과하게 불량 처리했다거나 불량을 정상으로 만들고 정상을 불량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일도 아니다. 몇 번의 사고를 겪고 검증 작업이 까다로워졌다. 까다로운 검증을 끝내고 최종적으로 품질보증팀의 허가를 받아내야 한다. 품질보증팀의 조건 테스트에서 불량이 발생하면 다시 해야 한다. 제조팀에게서는 마냥 기다리지는 않는다. 두 달이 넘어가는 순간 눈치를 받게 되고 석 달이 되면 욕을 먹기 시작한다. 물론 나 역시 새로운 업무를 배우면서 현진영 대리, 김팔봉 사원의 잡무를 돕느라 한가롭지는 않았지만, 나의 거절은 거절당할 것이 뻔했다.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RMA 작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10년 보증이라는 것이 무섭다. 아주 오래전에 제조된 배터리 제품까지 모두 다시 받아서 검증을 해줘야 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배터리 업계는 매년 변한다. 좀 더 과장해서 6개월마다 변한다. 1월에 신제품을 받았는데 7월에 다른 신제품을 또 받게 된다. 상반기 제품을 개발하는 팀이 따로 있고 하반기 제품을 개발하는 팀이 따로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전 세계 최고의 배터리 자리를 놓치지 않는 비결이다. 그렇기에 10년 전의 제품은 매우 오래된 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대부분 종산 되어 단종되었을 확률도 있고 아직 양산하더라도 최소한의 생산만 한다. 생산 중이면 그나마 쉽다. 테스트 제조팀에 양산 장비를 잠시 대여해서 한번 테스트해 보면 끝이다. 물론 월말에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생산 중이 아니라면 우선 장비를 구해서 아무도 찾지 않아 어딘가에 먼지 쌓인 보드와 소켓을 창고에서 빼 와야 한다.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고 이 또한 제조팀에 부탁해야 해서 상당히 귀찮아하는 일이다. 그들의 지금의 생산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이너스다. 그래도 RMA 작업을 하면서 얻게 되는 점도 있고 배울 점도 있다. 그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며 RMA 전담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똥을 치워야 한다. RMA는 우선 전화나 메신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고철수 사원님. 고객 만족 팀 유대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RMA가 접수되어서요. 이번에는 Sony에서 왔습니다.”

Sony는 일본의 종합 전자 거대기업이다. Sony는 시장을 주름잡다가, 시장의 방향을 외면한 채 오로지 품질만 고집했다. 결국 사용자들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회사는 꾸역꾸역 유지되고 있었다. B2B( Business to Business) 사업에서 단골을 확보해 두었고 금성전자 역시 모든 사원이 Sony의 모니터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Sony와 금성전자는 서로의 고객이다.

“네, 관련된 고객 메일 전달해 주시고요. 제품은 언제 보내주실 거죠? 오늘 또 금요일인데 꼭 금요일에 걸리네요.”

“사용자들이 꼭 주말 앞두고 접수하더라고요.”

RMA를 전담하고부터 금요일의 정시 퇴근은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RMA 제품이 오는 날짜는 꼭 금요일이다. 아마도 제품을 빨리 받아야 오후 두 시다. 관련 메일을 확인해 보고 제품에 맞는 장비를 우선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김팔봉처럼 테스트해 보지도 않고 그냥 재현 안 됨 처리를 하고 싶다. 불량품을 재현시키려다가 내가 불량배가 될 것 같은 금요일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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