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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Sep 22. 2024

블랙리스트 혹은 화이트리스트

우리는 당당한 블랙리스트다.

[지이이잉]

문희준 팀장의 전화다.


"철수님, 이제 거의 되었는데 갑자기 복병이 생겼어요."


"네?"


"그것이 지금 기업문화라는 그룹에 인사팀이 따로 있는데요. 인사팀장이 말하기를 테스트 그룹에서 미전실로 인력을 받은 일이 유례없는 일이라면서, 꼭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소명서를 제출해 달라고 하네요.."


"아…."


언제나 인사팀이 복병이다. 그들은 기업문화의 탈을 쓰고 회사의 문화를 어렵게 만드는 집단이다. 지금도 현장의 사정은 모른 채, 그저 진행해 본 경험이 없다면서 새로운 일을 만들기를 꺼리고 있다. 인사팀의 직원들은 직원들의 선택을 받을 일이 없다. 가끔 소통 채널을 만들어서 직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척할 뿐이다. 그들의 그런 연기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인사팀 사람들은 선택권을 절대로 놓지 않는다. 철저하게 회사의 제도를 오너의 입맛에 맞게 고치고 직원들을 옥죄는 사람들이다. 이번 조직 변경은 그들에게 전혀 이득이 될 것이 없는 불편한 일인 것이다.


다음날, 문희준 팀장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소명서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작성해 볼게요.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나 싶어서 전화했어요."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퇴사까지 결심했었다. 게다가 문희준 팀장이 이렇게까지 나를 받아주기 위해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퇴사할 때는 하더라도, 여기까지 온 김에 최대한 어필을 하기로 했다.


"저의 전략을 말씀드리자면... 배터리 회사에서 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실무자 레벨에서 풍부한 경험을 했어요. 예를 들면 조립 공정부터 시작해서 출하 검사까지 실무자로 일한 것이에요. 그 경험을 갖고 제품팀에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해요. 폭넓은 경험으로 깊은 제품 분석을 하고 싶어 한다고 언급하고 싶어요."


"훌륭하네요. 역시 내가 사람 잘 봤어."


문희준 팀장이 내 의견을 잘 정리해서 소명서를 제출해 준 덕분에 인사팀의 마지막 관문을 넘었다.




일주일 만에 그룹 이동 발령이 났다. 인사팀장의 말대로 정말 유례없는 일이긴 하다. 테스트 그룹 사람들의 조용한 축하를 받으며 짐을 정리하고 떠났다. 조병진에게는 따로 인사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내 팀장도 아니니까.. 이제 K1 공장으로 다시 출근한다. 생산부로 가는 것은 아니고 제품팀으로 출근을 한다. 조직도를 보면 미전실에는 수십 개의 팀이 있다. 대부분 팀은 본사와 다름없는 부천공장에 있는데 제품팀만 이곳 금성 공장에 있다.


"안녕하세요. 고철수입니다."


가장 먼저 문희준 팀장에게 가서 인사했다.


"어, 철수님 왔어요? 가만있어 보자. 우선 팀원들과 인사 좀 합시다. 한수야, 애들 좀 불러서 여기 중회의실로 좀 오라 그래."


"네, 팀장님."


건너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젊은 사원이 벌떡 일어나서 대답했다.


"아! 이분이 새로 저희 팀으로 오신!"


"그래 맞아 한수야, 인사해라. 너보다 한참 선배님이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한수입니다."


박한수는 내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자세를 보나 표정을 보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으로 보인다. 얼굴에 아직 젖살이 남아있고, 양 볼이 발그레하다. 상고머리에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어 눈이 작아 보인다. 안경테도 둥글고, 얼굴도 전체적으로 둥글었다. 몸도 둥글고 착한 사람 같았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고철수예요. 잘 부탁해요."


그의 인사성에 나도 모르게 선배처럼 인사를 받았다.


"자, 개발실에 내려간 사람들 콜 했으니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회의실에 먼저 들어갑시다."


문희준 팀장이 말했다.


오랜만에 들어가 보는 중회의실이다. 5년 전에 조립팀에 있을 때 매일 아침 들어갔던 회의실이다. 당시 20명의 팀원은 팀장 대리만 몇 달째 하고 있던 부장에게 매일 아침 혼났다. 모두는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하면서 메일을 견뎠다. 이제 그런 사람은 흔적조차 없다. 이 커다란 회의실에 문희준 팀장과 박한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앉아있으니 공허했다.


"다들 오라고 했지?"


문희준 팀장이 물었다.


"네, 싹 다 연락 돌렸습니다."


박한수가 대답했다.


"너, 철수님 조심해야 해. 무서운 친구야."


갑자기 문희준 팀장이 박한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놀리는 것 같았다.


"헉, 제가 잘하겠습니다."


박한수는 바로 쫄아서 대답했다.


"야, 남자가 그 한마디에 바로 쫄기는, 크크. 농담이다."


문희준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팀장과 신입사원이 농담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매우 낯설었다. 그 어떤 팀에서도 볼 수 없던 풍경이다. 곧이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여섯 명 정도가 들어와 앉았다.


"자, 다들 왔습니까? 철수님, 우리 팀원들이에요. 먼저 인사를 하면 좋겠네요."


나는 어색하게 일어났다.


"그냥 앉아서 편하게 해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팀원이 말했다. 부장급으로 보인다. 아마도 팀장보다도 연차가 있어 보였다.


"그래, 그냥 앉아서 편하게 합시다. 이 친구 키도 커서 그런지 고개 들고 보기 목 아파. 크크."


문희준 팀장이 말했다. 나는 팀장의 말대로 앉아서 최대한 간략하고 굵고 짧게 인사했다.


"저 친구는 여기 오자마자 고참이네. 크크. 근데 이름이 나랑 왜 이렇게 비슷해? 맞아. 야, 전에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않았나? 의뢰하러 몇 번 왔었지? 나 기억 안나?"


과장급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그의 말이 맞다. 조립팀에서 일하던 시절에 개발실에 의뢰자로 몇 번 갔다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회의에서 함께한 적도 있다. 그는 많이 늦은 시간에 참석했었다. 그는 그때의 느낌 그대로 재미있고 적극적이며 입체적인 사람이다. 그의 입은 컸고 튀어나왔으며 코는 높았다. 눈은 웃고 있지만, 분석하는 사람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키는 170 초반 정도 되는 것 같고 군살 없는 탄탄한 몸이다. 태닝을 한 듯한 갈색 피부에 등산바지와 기능성 티를 입고 있다.


"오, 고천수랑 고철수 둘이 구면이구먼."


부장급 팀원이 말했다.


"정확하게 구면은 아니고, 지나가면서 본 적 있고 전화상으로 일면식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크크."


고천수가 말했다.


"저 친구가 사실 우리 팀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이에요. 크크."


문희준 팀장이 내게 귓속말을 하듯 말했다.


"에이, 왜 또 그런 이상한 농담을 하세요."


고천수가 말했다.


"맞잖아. 크크. 자, 그러면 우리 쪽도 한 명씩 간단하게 인사합시다. 천수 했으니까 오른쪽으로 돌면서 하시죠."


문희준 팀장이 말했다.


"저는 박선준 사원입니다. 2014년에 입사했습니다."


박선준이 인사했다.


"선준 님아, 직급 이제 없어졌잖아. 쟤는 관성이 오래 간단 말이야."


고천수가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과장님."


박선준이 말했다.


"어휴. 저거 내가 볼 때 못 고쳐."


고천수가 말했다. 박선준은 나보다 3년 후배다. 키 크고 마른 몸매가 나와 비슷하다. 피부가 하얗고 착하게 생겼다. 얼굴이 웃상이다. 그래도 4년 차라고 신입의 티는 나지 않았다. 상고머리에 눈과 입이 컸다. 이 팀에 들어오려면 눈과 입이 커야 하나 싶었다. 옷차림이 전형적인 공대생의 옷차림이다. 청바지에 체크 셔츠를 입고 있다.


"저는 아까 인사드린 박한수입니다. 작년에 입사했습니다."


박한수가 다시 인사했다. 의자에 앉아서 인사하는데도 고개를 심하게 숙여 인사를 해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게 아닌가 조금 놀랐다. 인사성 하나는 다시 봐도 좋아 보였다.


"김서방입니다. 저도 작년에 들어왔고 계측기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김서방이 인사했다.


"아. 이 친구는 박사로 입사했어요. 어쩐지 좀 삭았다 싶죠? 옛날로 따지면 과장급으로 입사한 거죠. 우리 그룹에서 전략적으로 고용한 인재예요."


문희준 팀장이 덧붙여 말했다.


"에이, 삭았다는 표현은 좀 하지 마시지…."


김서방이 말했다. 김서방은 이름답게 상당히 옛날 사람처럼 생겼다. 검붉은 피부에 상고머리고 눈은 작다. 입은 크고 코가 작다. 이 세 가지 조합 때문에 사람이 조금 더 촌스러워 보이고 못나 보였다. 사실 그의 이목구비 조합이 그를 삭은 사람으로 만든 원인이다. 게다가 옷은 역시 청바지에 체크 셔츠로 공대생의 전형이었다.


"저래 보여도 서울대 학, 석, 박이야. 엘리트야."


고천수가 말했다.


"에이, 그 얘기 좀 하지 말아 주세요…. 자, 다음."


김서방이 말했다. 서울대 출신도 처음 봤는데, 박사까지 한 사람은 더군다나 주변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만큼 주변에 공부 머리가 있는 친구는 없기도 했다. 서울대 학·석·박이면 대한민국의 1%가 아닌가. 아니다 1%도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0.1%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외형에 비해 학력이 놀랍다. 어쩐지 그의 얼굴만 과장급이 아니고, 그의 말투도 이미 과장급의 말투다.


"저는 장나라에요. 한수 동기고 저도 다른 팀에서 왔어요. 키키."


딱 봐도 말괄량이 같은 소녀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소녀 같기도 하다. 작년에 입사했다면 24살일 것 같다. 주근깨와 마른 몸을 보면 빨강 머리 앤이 연상된다. 작은 눈에 작은 코, 입만 크다. 하지만 그 입은 계속 웃고 있어서 전체적인 얼굴을 웃상으로 만들었다. 머리는 길지만, 싸구려 머리끈으로 대충 묶어둔 모습이다. 못생겼지만 애교 있게 생겼다.


"저는 남지현입니다. 한수 동기입니다."


"야, 너는 자기소개도 그렇게 로봇처럼 하냐? 너 정말 로봇 아니야?"


고천수가 말했다.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남지현이 대답했다.


"저거 로봇이야. 내가 언젠가는 뜯어봐야 해."


고천수가 말했다. 남지현은 앞서 소개한 장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여성이었다. 앉아있는 모습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고 각을 잡고 있었다. 눈은 깊고 컸으며 코는 높았다. 입은 작고 입술이 얇아서 음식도 적게 먹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긴 생머리에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자…. 다 했나요?"


문희준 팀장이 말했다.


"팀장님, 저희 제일 큰 형님도 소개하셔야죠."


고천수가 말했다.


"아, 맞다. 큰형님 소개하셔야죠."


문희준 팀장이 말했다.


"큰형님은요. 나이 먹고 소개하려니 쑥스럽네요. 나이만 먹었지, 회사에서 오래 일해서 요즘은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문성근이라고 합니다. 1997년 어려운 시절에 입사했습니다."


문성근이 말했다. 1997년 입사면 거의 7년 전에 만났던 팀장들 급이다. 지금은 임원급이라는 얘기다. 그의 동료는 물론이고 그의 많은 후배마저 회사를 이미 떠났을 것 같다. 회사가 어려웠던 시절과 좋았던 시절을 몇 차례나 겪어낸 사람이다. 곧 장기근속 25년이다. 직책을 벗어난 저 여유로움은 충분히 30년을 채울 것 같은 선배다. 눈, 코, 입이 전체적으로 둥그렇게 생겼고 얼굴도 둥글다. 절에 있는 불상의 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 팀을 넘어서 우리 그룹의 큰형님이시죠. 제가 05년에 입사했을 때 이미 과장님이셨죠? 그때 어마어마하셨죠."


문희준 팀장이 말했다.


"맞아. 내가 듣기로 성근이 형 저렇게 순해 보여도 금성산 호랑이로 유명했었어."


고천수가 말했다.


"부끄럽게 언제 얘기를… 옛날이야기는 술자리에서나 합시다."


문성근이 말했다.


"형님 정말 부끄러워하시네요. 크크."


고천수가 말했다. 이렇게 모두의 소개가 끝나고 회식까지 하기로 했다. 회식하면서 제품팀 팀원들과 빠르게 친해졌다. 이곳 제품팀은 지금까지 겪은 팀들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다른 회사와 같았다.


"철수님, 오늘은 같이 개발실 한 번 가보자. 우리에게는 개발실이 현장이야."


고천수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개발실은 1층에 있었다. 정확하게는 반지하였다. B1F라고 되어있었다. 개발장비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 제품을 계측하거나 관찰하기 위한 장비다. 다양한 관찰 장비들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장비들을 사용해서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영역을 관찰한다. 머리카락 굵기 수준의 마이크로미터부터 나노미터 수준까지 관찰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초정밀 측정장비다. 아주 미세한 진동에도 취약하다. 따라서 많은 개발장비는 1층이나 반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자동문이 열리며 개발실로 들어갔다. 수십 벌의 가운이 걸려있는 옷장이 있다. 가운을 입으니 의사나 연구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발실은 고요했다. 생산부 현장처럼 수많은 장비와 로봇의 소음은 없었다. 개발장비는 대부분 외국 장비로 보였다. 장비의 원산지가 일본, 독일, 미국산이다. 장비 앞에는 가운을 입은 현장 사람들이 앉아서 장비를 조작하고 있었다. 정적인 모습에서 정적을 느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생산부의 현장 사람들, 웹툰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테스트 그룹의 현장 사람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다른 모습의 현장을 볼 때마다 마치 다른 회사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천수와 개발실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제품의 시편을 미세하게 가공하면서 계측하는 계측기가 있었고, 고배율로 계측하는 계측기, 초고배율 투과 계측기 등이 별도의 공간에 있었다. 제품을 절단하거나 깎아주는 시료 가공 장비도 있었다. 개발실에는 제품 테스트 장비도 있었다. 나는 주로 양산 테스트 장비를 사용했고, 가끔 고객 불량 분석을 할 때 계측 전용 장비를 사용했었다. 이곳은 계측만을 목적으로 하는 테스트 장비만으로 가득했다. 전압과 전류를 조건별로 이용해서 제품을 분석하는 장비도 있었고, 제품에 강제로 과부하를 줘서 결함을 확인하는 장비도 있었다. 장비를 다루는 방법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작 이 장비를 배우기 위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취업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금 더 알고 보니 그들은 장비를 다루는 것보다는 계측 결과를 갖고 저마다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고, 그 시나리오에 그들만의 이론을 덧붙였다. 사실상 분석을 의뢰한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업무 시간을 제외하면, 주로 티타임을 갖는 동료는 박선준, 박한수, 장나라였다. 그 외의 사람들은 업무 몰입도가 높았다. 박선준은 이제 대리급의 사원이고, 박한수와 장나라는 이제야 2년 차가 된 갓 신입사원을 벗어난 후배였다. 우리는 자주 모여서 작당 모의를 했다. 처음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듣게 되다가 나도 이 티타임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주로 퇴사에 관해 얘기했다. 퇴사를 언급하면서 각자 사업을 펼치고 싶은 분야를 말했다. 여유 있는 부서라서 저 연차에 벌써 이런 얘기를 하는구나 싶은 기성세대 같은 생각을 했다가, 이내 정신 차렸다. 수많은 경영 사상가의 책을 읽고 배우며, 스스로 거대기업의 그저 그런 기성세대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박선준은 안드로이드 기반 로또 분석 앱을 제작해서 대박을 내고 싶어 했고, 박한수는 주식 자동 매매 프로그램을 코딩하고 있었다. 장나라는 결혼을 잘해서 은퇴하는 것, 이른바 혼테크를 꿈꾸고 있었다. 박선준은 안드로이드에 코딩하는 것을 공부한다며 천 페이지 분량의 코딩 책을 본다고 했다. 박한수는 원래 코딩에 풍부한 경험이 있어서 C 언어로 주식 매매 프로그램을 코딩하고 있었다. 장나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혼테크를 하려면 어느정도 매력적이거나 아름다워야 하는데, 그녀의 외모는 특별하게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어쨌든 각자 일찍부터 나름의 퇴사를 꿈꾸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 꿈을 꾸고, 대학에서는 취업을 꿈꾸고, 회사에서는 퇴사를 꿈꾼다. 애초에 꿈이라는 것은 누구의 꿈인지 정의하기 힘들다. 그저 사회에서 정해둔 꿈인지도 모른다. 이들과 나는 매일 오전, 오후에 한 번씩 티타임을 가졌다. 그들은 점점 반사회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선준 선배님, 익명게시판 보셨어요? 우리 들고일어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박한수가 말했다.


"뭔데 또?"


박선준이 물었다.


"인사팀 새끼들이 또 우리 연봉 갖고 장난치려고 하는 거요."


박한수가 말했다.


"어휴, 난 그냥 기회 봐서 빨리 결혼하고 퇴사해야지."


장나라가 말했다.


"와, 전에 그거 적용할 거래? 실화냐?"


"실화 맞습니다, 선배님. 이거는 들고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무슨 얘기예요?"


내가 모르는 척 물었다. 최근 인사팀에서 부문별, 그룹별 평가와 연봉 자가 설계 시스템을 몇 년간 일부 조직에 파일럿으로 적용해 봤고, 이제 전사적으로 적용한다는 내용이다. 평가와 연봉은 조직별로 등급 비율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과감하면서 직접적인 연봉 삭감이 가능해졌다. 익명게시판에 누군가 분석한 글에 따르면, 평고과를 받아도 연봉이 삭감되는 계산식을 올리며, 현재 적용될 자가 설계 시스템의 부작용을 비판했다. 평가와 연봉을 유기적으로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인건비를 줄이려는 속셈이었다.


"와, 이렇게 거대한 기업에서 인건비를 개선하려고 이렇게 수를 쓰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게 인사팀 애들 목표니까요."


박한수가 말했다.


"철수 선배, 우리 노동조합이라도 만들어서 죽창이라도 잡으시죠."


박선준이 말했다.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조직별로 설명회가 진행되었다. 설명회의 진행은 그룹장급이 맡았다. 내용은 성과와 보상에 대한 시스템의 혁신에 대한 것이었다. 기존에 일부 조직에서 시범적으로 진행되던 평가와 연봉 자가 설계 시스템에 관한 내용 그대로였다. 임금 삭감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마치 더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회가 끝나고는 전 직원에게 전자메일이 한 통씩 도착했다. 취업규칙 변경에는 직원의 동의가 필요하기에 서명을 받는 모양이었다. 전자메일의 내용은 정말 모호하고 교묘했다. 취업규칙의 찬성과 반대를 투표한다는 내용은 찾기 힘들었고, 설명회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로 서명을 유도했다. 물론 메일에는 설명회의 내용도 없었다. 생각보다 똑똑했던 우리 배터리 제국의 노예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 사무실 전체가 뒤숭숭했다.


"이거 뭐예요? 그냥 사인하면 되는 건가?"


장나라가 말했다.


"아오, 이 바보야. 이게 그때 설명회 내용 동의할 것인지 묻는 서명이잖아. 넌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여기 와서 있냐."


박선준이 말했다.


"뭐라고요? 어휴. 몰라, 난 어차피 이 회사 오래 안 다닐 거라서 서명하고 끝낼래요."


장나라가 말했다.


"어? 남은 사람 생각해야죠."


박한수가 말했다.


"몰라요. 난 이런 문제로 신경 쓰기 싫어요."


장나라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와, 아무리 우리가 개노답이지만 너가 제일 노답이다."


박선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업문화 총무팀은 본부별, 그룹별 서명자의 인원수를 파악했다. 아직 서명한 사람의 비율이 저조한 조직을 겨냥해 전체 메일을 보냈다. 익명게시판에는 어떤 직원이 지금의 상황은 연봉 계약 규칙의 날치기 통과를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규칙의 변경으로 연봉의 삭감이 매년 가능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직원들이 부담해야 할 몫이다. 더욱 박탈감이 느껴질 만한 것은 임원진들에게는 매년 천문학적인 연봉과 성과금이 보장된다는 거다. 배터리 제국의 노동자들은 연구원들, 엔지니어들, 모든 사무직 직원들은 하나둘씩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반수가 넘지 않는 서명으로 인해 2차 설명회가 진행되었다. 2차는 동영상 설명회로 진행되었고, 소통을 한다는 의미로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졌다. 설명회의 내용은 1차 설명회와 같았다. 일 잘하는 사람은 연봉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외의 사람은 연봉이 삭감된다는 것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동영상 설명회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어서 각자 자리의 컴퓨터로 확인했으며, 자료 배포가 되지 않는 것은 여전했고, 캡처가 방지된 보안 프로그램도 있어서 누구 하나 증거 자료를 남기기 쉽지 않았다. 설명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박한수가 채팅창에 질문했다.


(안녕하세요. 금성 공장 제품팀 박한수입니다. 본 시스템이 적용되면 임금 삭감이 되는 직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전체 임금에서 삭감되는 사람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공개 가능할까요?)


도발적이지만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같은 팀 박선준입니다. 전체 임금에서 파이를 나눠 갖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전체 파이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시나요?)


여기에 내가 결정타를 날렸다.


(실제 파일럿을 시행하는 그룹에서 연봉 삭감된 1인 여기 있습니다.)


현재 제품그룹에서 질문이나 말을 한 사람은 100명 중에 나를 포함한 박한수와 박선준, 이렇게 셋뿐이었다. 대부분 질문하고 싶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저 의심스러운 부분을 직접 질문하는 것을 보고 사무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영상 설명회를 진행한 그룹장은 채팅창을 보기는 하는지, 금붕어처럼 그저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에 정리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진행자는 급하게 동영상 설명회를 마무리했다. 2차 설명회가 끝나고 나서는 조직별로 서명을 독촉하는 메일이 다시 도착했다. 결국 문희준 팀장이 팀 회의를 소집했다.


"여러분, 조금 언짢은 마음을 가진 분도 있겠지만 조직별로, 그리고 팀별로 서명률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서명을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렇게 팀장으로 얘기를 하는 것도 일이라서 상황 전달을 드립니다.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서명은 자율에 맡기겠습니다."


문희준 팀장은 진심으로 말했다.


"저는 서명을 했습니다."


제일 고참인 문성근이 눈치 없이 말했다.


"저도 했습니다."


김서방도 그 분위기에 동참해 말했다.


"뭐야? 이렇게 서명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아까 얘네들이 채팅으로 질문한 것은 답변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요?"


고천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서명 날짜가 오늘 점심시간까지예요. 아무래도 그 답변은 받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썩 내키지 않는 상황입니다만…. 아무튼 그럼 이만 정리하겠습니다."


문희준 팀장은 얼굴을 붉히며 회의실에서 나갔다.


"에이씨 난 안 해…."


고천수도 자리를 박차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결국 서명은 반수가 넘게 진행되었고, 취업규칙은 기업문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블랙리스트로 등재되었고, 남들보다 발 빠르게 서명한 사람들은 화이트리스트로 등재되었다. 그렇게 기업문화는 노동자들을 블랙과 화이트로 나눴다. 나를 포함한 티타임 멤버는 당연히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우리 블랙은 앞으로 부당한 일을 겪을 게 뻔했다. 하지만 우리는 당당했다. 심지어 근거없는 자신감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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