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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Sep 21. 2024

난 선택받는 회사원이 아니라 선택하는 회사원이다.

난 시스템의 노예가 아니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에서 제일 높은 양반인 정동환 그룹장의 자리로 가서 인사를 했다. 직급 통일이 되면서 팀을 대표하는 팀장이라는 호칭만 남았다. 그룹장 이상은 그냥 그룹장이라는 호칭으로 통일되었다. 최근 들어서 호칭에 대한 제도가 매년 바뀌면서 상무, 그룹장, 팀장, 담당 등의 호칭이 혼재했다. 난 호칭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냥 과거의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정동환 그룹장은 여전히 그만의 엄격, 근엄, 진지함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 이름이 고철수였던가… 아무튼 오늘이 복직이었던가요? 맘고생 했어요."

사실 맘고생은 전혀 없었다. 쉬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난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상무님. 오랜만에 뵙고 말을 꺼내기가 좀 그렇지만, 저 다른 팀을 알아보고 전배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그래요. 어디든 마음 편한 곳이 최고지. 결정되면 알려줘요."


돌직구를 던졌다. 그러나 상무는 내가 팀을 옮기겠다는 것에 놀라거나 고민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다른 팀도 개인적으로 알아봐서 가라는 식의 대답이었다. 심지어 오늘이 복직일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 같았다.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듯이 지난해 난 테스트 그룹의 전력에서 제외된 사람이었다. 심지어 신년 인사이동 계획에도 제외된 사람이다. 내가 그냥 그렇게 휴직하고 이어서 퇴사할 줄 알았던 것이다. 사실 퇴사하는 사람들이 근속연수를 늘리기 위해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난 터덜터덜 내 자리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


"어, 철수 왔네?"

자리를 찾으러 팀으로 오자 김윤태 과장이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과장님. 잘 지내셨어요?"

"똑같지, 뭐. 철수가 쉰 지 벌써 반년이 지나갔다니 시간 빠르다. 그리고 우리 직급 개편되어서 이제 모두 직급을 안 불러. 어색하겠지만 이름에 '님'을 붙여서 부르면 된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윤태님."

"철수가 좀 쉬고 오더니, 적응력이 좋아졌네. 하하."

"근데 제 자리가 어디예요?"

내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전체적으로 자리 배치가 바뀌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그게 철수야…. 보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자리가 바뀌면서 너 자리를 챙기지 못했네…."

자리가 없었다. 이제 휴직을 끝내고 복직해서 엄연한 회사의 직원인데 자리가 없었다. 모두 내가 복직과 동시에 퇴직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직원이지만 자리가 없다는 것은 이상했다. 예전의 나라면 화가 났을 상황이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른 팀으로 옮길 것이기 때문이다. 차례로 나머지 팀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조병진 팀장 그 양반과도 인사를 했다.


"그래요. 잘 회복했어요? 놀더니 얼굴은 좋아졌네."

당신 얼굴 안 봐서 좋아졌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네, 좋은 시간 보내서 괜찮아졌습니다."

"철수씨 혹시 사내망에 로그인해서 작년 평가 결과 봤어요?"

"그건 아직 못 봤는데요?"

"그래요. 자리에 가면 확인해 보도록 해요. 뭐 다른 할 말은 없고?"

"저는 다른 팀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요? 자꾸 그렇게 옮기면 안 좋은데."

"여기 있는 게 더 안 좋은 것 같아서요."

"뭐?? 어디 갈 팀은 있고?"

"알아봐야 합니다. 상무님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뭐 그럼 얼른 알아보시고 결정되면 얘기해 줘요."

팀장도 상무처럼 본인 일이 아니라는 듯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철수 선배. 자리는 일단 여기 팀 공용 컴퓨터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선배님 컴퓨터가 반납 처리되어서요. 다시 신청해 두었어요. 나오기 전까지 불편하시더라도 이 자리에 계시면 될 것 같아요."

여전히 팀의 막내를 맡고 있는 임요한이다. 그는 교회 목자의 아들로 인기 많은 교회 오빠가 될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30년이 넘도록 모태 솔로다. 사회가 변하며 교회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에 반드시 교인을 선택하려는 그의 노력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난 지금 내 자리도 찾지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 넓은 생각이긴 하다.

"어, 고마워 요한아."


공용 컴퓨터의 위치는 사무실에서 제일 안 좋은 자리에 있었다. 막내인 요한이 자리보다도 더 바깥쪽이다. 한마디로 제일 바깥 통로 쪽의 자리다. 옆에는 정수기와 커피 머신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멈춰 서는 자리였고, 그 옆에는 쓰레기통도 있었다. 그나마 화장실 옆자리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치욕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이것 또한 받아들였다. 공용 컴퓨터 자리는 지저분했다. 자리를 대충 치우고 페이퍼 타월에 물을 묻혀서 책상을 닦고, 키보드와 마우스의 이물질을 대충 닦았다. 공용 자리는 늘 그렇듯이 누구도 청소하지 않는 자리라서 생각보다 아주 지저분했다. 컴퓨터를 켜서 계정에 로그인했다. 암호가 틀렸다. 7년간 로그인했던 계정인데 기억이 안 난다. 머리를 쥐어짜듯이 암호를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암호를 넣어도 계정에 접속할 수 없었다. 결국 OA 팀에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OA담당자는 금방 자리로 왔다. 휴직하는 바람에 암호가 초기화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복직자를 기꺼이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과거의 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의 달라진 내 모습이 스스로 대견했다. 어렵게 계정에 접속하고 팀장의 말이 생각나서 작년 인사고과를 확인해 봤다. 인사팀 가이드로 휴직자에게는 차별 없이 보통의 등급인 다등급을 주는 것을 권장한다고 알고 있다. 등급을 조회했다.


[라등급]


조금 놀랐다. 인사팀 가이드를 무시하고 최저등급을 준 것이다. 상대평가로 팀원 중의 한명은 저등급을 받긴 해야 한다. 그렇긴 해도 테스트 4팀은 인원이 적어서 저등급 할당이 없어도 되는 팀이다. 테스트 그룹 차원에서 전체 비율은 정해져 있다. 한 마디로 전체 밥그릇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 내게 저등급을 주고 누군가에게 등급을 나눠준 모양이다. 게다가 최근 인사팀에서 새로 만든 자가 설계 조회라는 메뉴도 있었다. 말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지만, 쉽게 말해서 월급의 비율을 그룹 내부적으로 조절하는 새로운 제도다. 다등급이 100%라면 가등급은 120%, 나등급은 110%, 라등급은 90%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등급은 한두 명뿐이고, 나등급은 절반의 인원, 다등급이 절반의 인원으로 할당된다. 아무튼 라등급인 내 월급은 이제 90%일 것이다. 예상은 되지만 산술 조회를 해봤다.


[80%]


다시 한번 놀랐다. 눈을 비비고 다시 조회를 해봤다. 여전히 80라는 숫자가 떠 있다. 90%에서 10%마저도 빼갔다. 10%를 빼서 남은 사람 중에 누군가에게 더해진 셈이다. 이렇게 연봉이 20% 삭감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벼룩의 간까지 뽑혔다. 그룹에서 이미 나를 퇴사자로 낙인찍어둔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었다. 어쩐지 출근해서 상무에게 인사했을 때 그의 반응이 의외의 사람을 만난 반응이었고, 팀장도 그러했다. 저성과와 설계 결과는 1차, 2차 평가자인 상무와 팀장의 합작품이 분명했다. 이렇게 무자비한 평가를 했으면 피드백 기간에 내게 전화나 문자를 보내서 피드백 후 이의신청 기간을 줘야 한다. 그것이 회사의 사규다. 하지만 휴직자에겐 그것 또한 없었다. 평가 후 통보도 없었고 그냥 내가 복직을 했고, 출근하고 조회해서 알게 되었다. 인사팀의 가이드를 무시한 것을 넘어서 사규를 어겼다. 알고 지내던 노무사에게 연락해서 노동부에 신고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화가 나도 단단하게 날만한 상황이다. 어떻게 부재중인 직원에게 이럴 수 있을까 싶다. 회사의 인간들이 실망스럽다. 그 양반들이 나를 퇴사할 사람 또는 퇴사할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선택했으니, 나는 생각했던 대로 다른 팀을 선택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도망보다는 다른 팀을 선택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조직도를 열었다. 옮겨갈 만한 팀이 어디 있을까 살펴봤다. 우선 생산부에서 갑질을 하던 품질팀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규모가 커졌는지 품질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있다. 연락은 뜸하지만 입사 동기 여연이 아직 거기 있다. 그 밖에 업무적으로 알고 지냈던 몇 명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제는 다들 연차가 중견 사원이다. 다음은 지우람 형님이 있는 자동화팀이 눈에 띄었다. 배워야 할 점이 많겠지만 꾸준히 관심 있는 분야다. 그 옆에 대세 그룹인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이 눈에 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모든 기업에서 밀어주는 그룹이다. 민경훈 형님이 있는 품질보증 팀도 있지만, 테스트 관련 팀은 이곳을 벗어나면 다시는 쳐다보기도 엮이기도 싫다. 노사팀에도 아는 사람이 있고, 투자팀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구매팀에도 동기가 한 명 있다. 그녀.. 명세빈 상담사를 통한 보건그룹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주 가끔 의뢰자로 갔었던 제품팀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는 생산부 조립팀으로 돌아갈 생각도 있다. 그렇게 10개 이상의 팀을 추렸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순서대로 팀장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팀 소속 지인에게 연락해 보기로 했다.


"우람이 형, 오래간만에 연락드려요."

"어 철수야, 잘 있나? 너 벌써 복직했나?"

"네, 복직해서 출근했죠."

"쉬고 온다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 빠르네. 다닐만하겠나?"

"저 팀 옮기려고요."

"오. 어디로?"

"그게 사실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제가 찾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동화 팀에 자리 있을까요?"

"아이고. 힘들겠네. 일단 팀장에게 물어볼게. 잠깐 기다려봐…. 제기랄 안 된대. 경력직 면접 보기로 했데. 타이밍 지리네."

"어쩔 수 없죠. 바쁘신데 알아봐 줘서 감사해요. 또 연락드릴게요."

"아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타. 언제 민경훈이랑 밥이나 한번 먹자. 걔 한국 복귀했다고 하더라."

"네, 형님."


아쉬운 마음을 갖고 다음으로 품질팀 여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행님, 잘 지내쇼?"

"못 지낸다."

"우짠일인데예? 누가 괴롭힙니까?"

"괴로워도 울지 않기로 했다. 나 팀 옮기려고."

"그래예? 어데로 가는데예?"

"너희 팀 자리 없냐?"

"엥? 행님아, 생산부로 다시 오고 싶어예? 여기 지금 상무 바뀌고 최악이에요. 상무는 전무로 올라가고, 지금 그 예전 회의실에서 재떨이를 던지기로 유명했던 마동탁이 그너마가 상무에요. 칼부림 장난 아니에요."

"아이고, 연초부터 정신없겠네. 너 목소리만 들어도 정신없다."

"네, 여긴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이소. 행님."

"쩝…. 그래, 알았다."




생각보다 내가 골라낸 팀들에게 자리를 묻는 과정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데이터 사이언스 쪽에는 인맥이 없어서 메일을 작성했다.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 내 3개 팀 팀장에게 모두 메일을 보냈다. 데이터 아키텍처 팀, 데이터 과학팀, 데이터 기획팀 이렇게 3개 팀이 있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메일을 보냈다. 자기소개를 작성하고, 어떤 업무 경험을 갖고 팀에서 어떤 방향으로 업무를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메일을 작성했다. 같은 회사지만 경력직 공채나 특채에 지원하듯이 자기소개서를 꼼꼼하게 작성했다. 혹시나 모를 면접에 대비해서 잊고 있던 업무 경험을 따로 요약하고 정리했다. 7년간 참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 어떤 팀에서도 답장이 없었고, 지우람 형이나 여연등의 그 어떤 지인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철수씨, 업무시간에는 될 수 있으면 모니터에 업무와 상관없는 내용은 띄어놓지 맙시다."

"아…. 네."

조병진 팀장이 지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혹시나 모를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과의 면접을 위해서 최신 데이터 과학의 학술조사와 최근 동향을 보고 있었다. 조병진 팀장에게는 딴짓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긴 그가 알 턱이 없었다. 내가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철수씨, 근데 다른 팀으로 언제 옮길 거예요?"

조병진 팀장이 가던 길을 멈춰 서며 뒤돌아서 내게 물었다.

"아직 조율 중입니다."

대충 대답했다. 사실은 아무것도 진행이 안 되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속으로 비웃을 것이 분명했다. 의미 없겠지만, 그것은 피하고 싶었다. 메신저 알람이 떴다. 현재 업무를 하고 있지는 않기에 누가 보낸 메신저인지 궁금해서 바로 클릭했다. 혹여나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에서 메신저가 온 것은 아닐까 설레며 클릭했다.


(멍멍아 복직했냐?)

실망했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메신저다. 4년 전 테스트 그룹에 처음 왔을 때 봉팔이와 함께 술 한잔했던 친구다. 그녀는 제품 분석을 도와주는 일을 했던 현장 직원으로 술 한잔하면서 그냥 갑자기 친해졌다. 그녀는 내가 개띠라는 이유로 나를 4년째 멍멍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웃어넘기며 나도 그녀를 찍찍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아이 넷을 키우는 애국자이며, 쥐띠인 워킹 맘이다.

(야 이 찍찍아, 나 죽겠다.)

(왜 또 그래. 다 괜찮아져서 복직한 거 아니야?ㅋㅋ)

(아니 그냥ㅋㅋ 나 다른 팀 가고 싶은데 받아주는 곳이 없네 ㅅㅂ.. ㅋㅋㅋ)

(멍멍아 우리 팀 지원해봐 나 조직 바뀐 거 모르지?)

(뭐로 바뀌었는데)

(손꾸락 두고 뭐하냐 조직도 검색해 봐 ㅋㅋ)

찍찍이는 연구소 조직으로 바뀌어있었다. 연구소 미래전략실의 제품팀이다.

(우와 뭐야 조직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되기는 ㅋㅋ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테스트 그룹에서 몇 개 있던 제품 분석 장비랑 그거 만지던 사람들 모두 여기 연구소에서 가져왔어ㅋㅋ 통합된 거야)

(우와 너랑 제품 분석했던 껀덕지로 거기 지원해 봐야겠다 ㅋㅋ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구나 ㅋㅋ)

(멍멍이가 뭐라는 겨 ㅋㅋ 암튼 나도 잘 얘기해둘게ㅋㄷ 잘해봐 ㅋㅋ)




연구소 미래전략실이라면 금성전자 최고의 그룹이다. 입사 커트라인이 제일 높기로 유명했고, 그만큼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배터리의 최신 기술을 앞장서서 만들고 검증하는 그룹이다. 이런 그룹에 나 같은 직원이 설마 들어갈 수 있겠냐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버전으로 써둔 자기소개서 중에 하나를 골라서 팀 이름만 바꿔 대충 써서 미래전략실 제품팀 팀장에게 메일을 전송했다.


답장이 왔다. 의외의 수확이다. 아니다. 어쩌면 난 미래전략실에 맞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당당한 태도로 제품팀 팀장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사무실은 옛 생산부가 있던 K1 공장 사무동의 4층에 있었다. K1 공장으로의 4년 만의 귀환인 셈이다. K1 공장은 옛날 그대로였다. 4년의 세월은 배터리 공장의 건물을 바꾸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로비로 들어갔다. 가장 눈에 띄는 변경 점을 발견했다. 매점의 위치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구멍가게 같은 슈퍼가 있었는데 CU로 리모델링이 되어서 다른 위치에 들어와 있었다. 대기업이 대기업을 선택했다. 엘리베이터 옆의 층별 안내표를 읽었다. 4층에 있던 생산부는 모두 7층으로 올라가 있었다. 일부러 피할 일은 없지만, 구내식당이나 출퇴근길이 아니라면 딱히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만나야 할 팀인 제품팀은 4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오…. 선배님 아니세요?"

예전 생산부의 조립팀에서 함께 있었던 탁용팔이다. 그 팀에서 힘들었던 기억들도 이제는 지난 추억이다.

"오…. 용팔아, 잘 지냈어? 나 다시 여기 올지도 몰라. 크크."

"와우…. 다시 생산부로?"

"에헤이. 큰일 날 소리를…. 그건 아니지. 크크. 확정되면 알려줄게."

"궁금하네요."

"야 너희 팀은 요즘 어때? 진달호랑 권준현 선배 다들 잘 지내나?"

"아…. 선배님 달호랑 친했죠. 달호는 부천공장으로 전배 가게 되어서 K5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K5 공장 새로 지은 거 아시죠? 원래 K4이라는 숫자를 쓸 차례인데 4라는 숫자가 좋은 숫자가 아니라고 건너뛰었데요. 최첨단 배터리 회사에서 웃기죠?"

"그렇네. 크크. 준현 선배는?"

"그 선배는 잘 풀렸죠. 미래전략실의 공정개발팀으로 갔는데 근무지는 부천공장 연구동 건물이라고 알고 있어요. 근데 그 선배는 어디 가서도 잘 지낼걸요?"

"다들 흩어졌구나."

"그거 아세요? 선배님이 있던 특수조립 팀 없어졌어요."

"헐 그래? 난 들은 게 없는데…. 하긴 그 팀에 친한 사람도, 연락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래서 그 팀 사람들 다들 흩어졌어요. 일부는 저희 조립팀으로 일부는 도색팀으로 일부는 혁신팀, 노사팀 뭐 다양한 곳으로 흩어졌다고 하네요."

"지난 4년간 변화가 많았구나…."

"아, 내 정신 좀 봐. 업체 들어왔는데 출입이 안 된다고…. 제가 나가봐야 해서요…. 선배님 다음에 옛날 얘기하면서 소주나 한잔하시죠."

"그래, 용팔아. 수고하고 또 보자."




4년의 세월 동안 K1 공장은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그 내부의 인간들은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변화의 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생산부는 더는 없었다. 지금의 생산부는 새로운 곳이었다. 탁용팔과 아쉬운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타고 4층으로 이동했다.


4층 사무실에 들어갔다. 예전 생각이 난다. 특수 조립팀은 4층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서 신입사원이었던 내 자리는 당연하게도 통로 쪽이었다. 엘리베이터와 제일 가까운 자리였다. 이 자리 근처를 다시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 변규선에게 매일같이 폭언을 듣던 자리, 장 파트장이 성희롱 가득한 농담을 했던 자리, 팀장이 근엄하게 앉아있던 자리들은 모두 그대로 있다. 지금은 셋 다 사규 위반으로 모두 회사에서 쫓겨났다. 웃긴 것은 세 명 다 직장내 괴롭힘, 성희롱, 보안위규 등으로 인한 중징계를 받으며 쫓겨났다는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제품팀이 앉아있고 그들의 흔적은 오간 데가 없다. 이제 와 남아서 그들의 흔적을 지켜보는 내가 승리자다. 시간의 무상함을 느꼈다.




제품팀 앞에 도착했다. 팀장 자리에 정수리가 빛나는 사람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고철수입니다."

"오. 안녕하세요, 철수님. 여기 상무님 자리에서 바로 얘기합시다. 상무님이 부천에 계시고 여기는 한 달에 한두 번만 내려와요."

문희준 팀장이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날아갔다. 옆머리와 뒷머리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굴은 팽팽하고 피부는 좋았다. 이른 나이에 일찍 탈모를 겪은 모습이다. 탈모 명의를 소개해 주고 싶었지만, 모공이 이미 죽은 것 같았다. 아무리 대한민국 탈모 3대 명의라고 해도 죽은 모공을 살릴 수는 없다. 그의 머리는 새로 심어야 했다. 대머리 팀장이지만 나이는 4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금성전자의 팀장 중에서는 젊은 편이다.

"메일 회신도 주시고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우리가 마침 제품그룹을 확장하면서 사람이 필요했는데 딱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철수씨 인상도 좋네요."

"감사합니다."

"제품의 이해는 잘하고 있을 것 같고, 분석에 대해서는 경험이 있나요?"

"네, 제품 분석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량 모드를 해석했고 원인을 찾기 위해서 단위공정까지 살펴보며 제품 담당 부서에 의뢰도 여러 번 맡겼습니다."

"그래요.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네요. 우리 팀에서는 언제부터 일할 수 있나요?"

받아주려는 분위기다.

"가능하시다면 내일부터라도 가능합니다. 저희 그룹 그룹장, 팀장께 모두 얘기되었습니다."

"근데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는데, 연차도 지금 8년 차면 좀 있는 편인데 왜 옮기려는 거지요?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지금 있는 곳이 익숙하지 않아요?"

"아, 사실 지금 팀은 제가 선택한 팀이 아니고 흘러가다가 정착한 곳이라서요. 그냥 있으면 편할 수는 있겠지만 가만히 않아서 죽어가는 확실한 죽음보다는..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모험을 해보고 싶어서 제가 선택할 팀을 찾고 있었습니다."

"흠..멋진 사람이군요. 회사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네요. 회사뿐 아니라 주변에서 보기 드문 청년 같아요. 맘에 들어요. 제가 이곳 제품그룹의 그룹장님인 윤교용 상무님에게 잘 얘기해서 빨리 여기서 근무하도록 해줄게요."




선택받는 회사원이 아니라 선택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대한민국 청년들의 선택받는 삶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의 시스템 아래서 체득된 경험으로 갖고 있다. 대한민국 유아기에는 몬테소리 같은 시대의 유행을 이끄는 교구재나 교구에 의해 선택받는다. 자의식이 생기기 전부터 교육자가 만든 시스템의 노예로 길들여진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되어버린 국민학교에서 철저하게 정해진 과목으로 선택된다. 확장 가능성이 무한한 어린이들을 폐쇄적인 환경으로 내몰고 있다. 중학교부터는 더욱 악랄해진다. 중요과목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것을 고등학교까지 죽어라 공부한다. 결국 많은 학생이 나가떨어진다. 공교육은 더이상 힘이 없고, 사교육은 프레임을 더욱 완고하게 만들극 행위를 부추긴다. 정부는 무책임하게 방관한다. 청소년도 학생이기에 앞서서 인간이기에 일찍 철이 들어버린 학생은 공교육이나 사교육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갈 길을 찾아간다. 극히 일부의 학생이다. 안타깝지만 대부분 학생은 프레임의 평균에 들어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하거나 나가떨어진다. 나가떨어진 학생들은 어른들이 배우라고 하는 기술을 배우거나 그냥 무의미하게 논다. 그렇게 그저 그런 노동자가 되거나 계약직, 일용직으로 자본가의 노예가 된다. 최악의 경우 양아치가 되거나 본인 밥벌이도 못하며 어디 빌 붙어서 삶을 겨우 연명한다. 경쟁에서 평균 우위를 점한 학생들은 수도권 대학교에 간다. 상위권 학생들일수록 명문대라고 불리는 꼰대들의 집합소에 들어간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마법의 주문 같은 대학교 서열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기출 변형으로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국제학교, 자사고, 과고, 외고, 설포카 같은 학교들도 치고 들어온다. 교육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의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쓸데없는 광기의 투자다. 그 광기의 투자 속에서 학생들에게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평균 우위를 점해야 한다.


남자들의 경우는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에 군대에 선택된다. 군대는 사람을 최대한 멍청하게 만드는 부조리 집단이다. 결국 제대하면 멍청해진다. 복학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교수들은 이상향을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당장 먹고살 길이 시급하다. 취업 준비, 공무원 준비, 자격증 준비, 사업 준비로 꼰대 교수들 밑에서 대학 생활을 보낸다. 아쉬운 사람들은 석사로 길들여지고, 더 아쉬운 사람들은 박사로 철저하게 노예화가 된다. 운 좋게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공무원 합격을 했다고 끝나지 않는다. 인사팀은 크게 생각을 안 하고 뺑뺑이 돌리듯 인원을 선택해서 배치한다. 결국 생각보다 많은 청년이 배치된 부서의 업무가 맞지 않아 힘들어하거나 불편한 인간관계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자들의 경우는 임신, 출산, 육아휴직을 겪으면 업무에서 배재되기 시작한다. 조직은 최대한 쓸만한 사람들을 관리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핵심 인원에서 밀려난다.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서른을 훌쩍 넘어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다.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한번 하지 못하고 그저 월급이라는 마약에 빠져서 평생 노예로 살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안타깝게도 진정한 자기결정을 한 번도 못 하고 경제 활동 기간의 수명이 끝날지도 모른다. 혹은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했다는 착각에 빠진 채로 청춘을 마감한다.


사실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모든 것은 시스템의 결정이었다. 매트릭스의 노예다. 이제 나는 그것을 깨려고 한다. 지금 내가 하는 방법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법이다. 내가 가고 싶은 팀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거의 다 왔다. 제품그룹의 윤교용 그룹장은 문희준 팀장의 말만 믿고 나를 받아주기로 했다. 그룹 간 상무급 임원 둘이 결정을 했기에 인사이동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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