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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company doesn’t exist.

by 부소유

[딩.. 딩.. 딩]


"이제 깨어날 시간입니다. 여러분 죽음에서 깨어나세요. 몇몇 분은 코를 골고 있는 소리 들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세요."


"아이고…. 잘 잤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와 함께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 명상은 내게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 줬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임사체험을 넘어서 유체이탈을 경험한 것이다. 유체이탈을 했다가 정신이 영원히 육신에 돌아가지 못해서 구천을 떠돌았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혼자 연습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도사는 주기적으로 책을 선물해 줬다. 명상 책부터 시작해서 인문학, 철학, 소설까지 선물을 받아 읽었다. 전호근 교수의 장자강의 책은 멀게만 느껴졌던 장자 철학을 독자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줬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우리가 읽고 깨달아야 할 고서다. 교수님이 워낙 쉽게 작성해 주셔서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장자를 읽을 수 있었다. 유사 임사체험을 경험하고 죽음이 궁금해서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도 구해서 읽어봤다. 과학적으로 말하는 죽음에 관해서 설명되어 있고 비과학적으로 말하는 죽음에 대해서도 작성되어 있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고 죽기 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인간은 정신인가, 육신인가, 아니면 인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고도화된 인지능력을 갖춘 생물일까. 몇 번 죽음을 고민했던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자살에 관한 생각보다는 일단 살자는 방향으로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해 준 책이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초병렬 독서법이라는 것을 알려드릴게요. 일본인 나루케 마코토는 생활하는 이곳저곳의 눈에 보이는 곳마다 책을 놔두고 언제나 어디서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지인이 초병렬 독서를 한다고 말했다네요. 책을 한 권만 정해서 정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책, 여러 장르를 동시에 읽는 방법이죠.”


“책을 그렇게 읽으면 정신없거나 헷갈리지 않을까요?”


한 선생님이 질문했다.


“집중이 안 되고 헷갈릴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할만해요. 제가 활용하는 방법이에요. 책을 줘도 못 먹는 선생님들을 위해서 알려드리는 조언입니다.”


“네. 크크.”


“선생님들 그거 아세요? 대한민국의 선생님들은 이미 초병렬 학습에 익숙해요.”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선생님들 국민학교 다닐 때 모두 국영수사과를 배웠죠? 앗, 여기 초등학교 출신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크크.”


“있는데요?? 크크.”


“아, 크크. 선생님들 세대를 모두 확증편향 해버려서 죄송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국영수사과뿐만 아니라 음악, 체육, 미술 같은 예체능부터 가사, 기술, 도덕, 윤리, 경제 같은 실용 학문과 예절까지 무려 한 시간에 한 과목씩 주 5일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을 받으면서 그 과목을 강제로 확장해 나갔죠.”


“아….”


“방법은 주입식 교육으로 잘 못 되어버렸지만, 선생님들은 학창 시절에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다양한 과목을 초병렬로 배웠어요. 즉, 제가 알려드린 초병렬 독서법은 그것에 비하면 쉬울 거예요.”




초병렬 독서를 바로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려고 가장 만만한 공공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 본 경험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도서관은 학창 시절 시험공부를 하던 열람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도서관에 왜 책을 읽으러 가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도서관의 목적은 독서다. 금성시 시립도서관에 도착했다. 공부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책을 목적으로 왔다는 것이 어색했다. 자료실은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접수대에는 사서 세 명이 앉아있었다. 남자 한 명에 여자 두 명이었다. 남성은 골격이 좋았고 단정한 스포츠머리에 무테안경을 착용한 젊은 사람이었다. 여자 1은 왜소한 체격에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 40대 여성으로 보인다. 여자 2는 여기서 제일 경력이 많아 보인다. 단발머리에 둥글둥글한 인상으로 50대 여성으로 보였다. 도서관은 한적했고 그들은 한가롭게 앉아서 각자 책을 읽거나 컴퓨터로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서라는 직업이 매우 평화롭고 부러워 보였다. 그것에 홀렸는지 혼자 서서 핸드폰으로 사서가 되는 방법을 찾아봤다. 알고 보니 문헌 정보학과라는 곳이 있었다. 준사서 자격증과 2급, 1급 정사서 자격증이 있는데 모두 대학교에서 전공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또는 사서교육원 과정을 이수하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사립도서관 사서에 지원하거나 사서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과정이 절대 만만하지 않다. 그들은 그 과정을 겪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난 사서가 되려는 생각을 접고 제일 편해 보이는 40대 여성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대출증을 만들고 싶어서요.”


“처음 이용하시는 거예요?"


“처음이에요.”


“신분증 주시고 남자분 따라가서 사진 촬영 부탁드려요. 정규 씨 이분 사진 좀 찍어서 전달해 주세요.”


정규 씨는 옆에 젊은 남성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난 그 남성을 따라가서 대충 사진을 찍고 마침내 대출증을 발급받았다. 사진이 들어간 대출증이 신기했다.


“이 대출증으로 금성시 어디에서나 도서 대출 가능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대출증을 받고 서가를 둘러봤다. 자료실 출입구에는 신간 도서와 사서들의 큐레이션 도서가 있었고, 서가의 책은 주제별로 정리가 되어있었다. 현재로는 독서 초보자이기에 큐레이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큐레이션 서가에는 채사장이라는 작가의 책이 정리되어 있었다. [지대넓얕] 1, 2권을 집었다. 그의 책 [시민의 교양]과 [열한계단]도 집었다. 이렇게 네 권의 책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큐레이션 덕분에 쉽게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작가 한 명을 정해서 여러 권의 책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작가는 팟캐스트로 유명해져서 책까지 출간하게 된 이제는 유명해진 작가다. 책의 1권은 현실의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를 말하고 있고 2권은 현실 너머의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연히 고른 책이 분야를 넘어선 여러 가지 얘기를 쉽게 말해주고 있었다. 관심 분야를 모를 때 읽기 좋은 최고의 책으로 생각되었다. 목차와 첫 문장을 읽자마자 바로 흥미가 생겨버렸다. 대출해서 읽기로 했다. 그의 다음 책인 시민의 교양과 열한계단은 지대넓얕의 심화 버전으로 보였다. 모두 대출해서 순서대로 읽어내기로 했다. 책과 가방을 자리에 두고 다른 책을 보러 주제별 서가로 이동했다. 총류가 있었고 철학 코너가 있었다. 총류는 000이라는 숫자로 분류가 되어있고 철학은 100이라는 숫자로 분류가 되어있었다. 그다음 종교, 사회과학, 순수과학, 기술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의 순서대로 200, 300, 400 이렇게 숫자 표기가 되어 분류되어 있다. 사서에게 물어보니 이 분류 방법이 한국 십진 분류표라고 했다. 천천히 산책하듯이 분야별로 책을 골랐다. 총류에서 세 권, 철학에서 세 권, 이렇게 분야별로 세 권씩 총 30권의 책을 골라냈다. 30권의 책을 골라내는 것에는 30분의 시간이 걸렸다. 그냥 골라낸 것이 아니고 그래도 목차와 서문 정도를 읽으며 골라냈다. 자리로 와서는 30권의 책의 앞부분을 읽었다. 잘 안 읽히면 정리하는 식으로 읽을만한 책을 골라냈다. 에세이 [보노보노 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와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를 골랐다. 상념이 많던 내게 필요한 책이었다. 여행책 [도쿄는 꿈맛]과 [퇴사준비행의 도쿄]를 골랐다. 진정한 여행을 가보지 못한 내게 여행에 대한 궁금증을 보여줄 책이었고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문화를 좋아해서 가깝고도 먼 도시 도쿄에 대한 신간을 골라냈다. 소설책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를 관두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일본소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영화로도 개봉될 정유정 작가의 스테디셀러 [7년의 밤], 베토벤에 대한 미스테리를 풀어낸 서양소설 [10번 교향곡]을 골랐다. 철학책으로는 그림으로 플랫랜드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정신병원 선생이 읽던 [월든]을 골랐다. 인문학 책으로는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골랐다. 채사장의 책 4권과 분야별로 고른 책 10권을 포함하면 총 14권이었다.


“저 이 책들 대출하려고 하는데요.”


“좀 많아 보이는데 인당 10권만 대출할 수 있어요.”


“그래요?”


아쉬움을 갖고 채사장의 책 4권을 뺐다. 채사장의 책은 소장 각이 보여서 별도로 구매할 계획이다.


“그러면 이렇게 10권으로 할게요.”




초병렬 대출을 했다. 10권을 백팩에 넣고 넣지 못한 것은 손으로 들며 책을 이고 지고 메고 귀가했다. 누가 보면 책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할법했다. 그도 그럴 듯이 요즘에는 책 읽는 사람보다 스마트폰 보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쉬운 현실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거니와 하물며 책을 구매하는 사람은 더 없다고 보면 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혁신을 이뤄냈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을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노예, 배터리의 노예다. 난 그 디지털 변화에 역행하여 아날로그로 회귀하려고 한다. 묘한 희열을 느꼈다.




숙소에 도착해서 책을 펼쳐놓았다. 보기만 해도 만족스럽다. 난 어쩌면 진작에 책을 읽어야 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책을 집안 곳곳에 놓았다. 곧바로 초병렬 독서를 실행했다. 독서는 내 성격에 잘 맞았다. 지금까지 읽어온 수험 서적, 문제집, 전공 책은 책이 아니었다. 점수를 따기 위한 책들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골라온 책들은 점수 따위는 없다. 그저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빌려온 책들이었다.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명상으로 얻는 평화와는 또 다른 평화의 세계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여행책은 도쿄를 더욱 가고 싶게 만들었다. 소설책은 주인공이 되어서 희로애락을 경험했다. 마치 매트릭스 세계에서 다른 인생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기분이었다. 소설책은 내게 여러 세상을 보여줬다. 철학책은 사유의 폭을 넓게 해줬다. 넓은 사유의 폭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월든은 내게 자연과 머무르는 것을 알게 해줬다.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은 인생관을 정립하게 도와줬다. 강의를 듣지 않아도 방구석에서나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호사를 누렸다. 독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했다. 독서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게임도 끊었다.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다섯 달 만에 300권의 책을 읽었다.




휴직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금성 병원에는 보름마다 가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약을 처방받았다. 그 외의 시간에는 철저히 외부 활동을 차단한 채 독서만 했다. 다시 읽게 된 고전 이솝우화에는 꿀벌, 개미, 베짱이가 등장한다. 개미는 하루를 열심히 산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몰되어 살아간다.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베짱이는 이를 비꼬며 쉬엄쉬엄 살아간다. 어려운 일 앞에서는 엄살 부리고, 쉬운 일만 요령 있게 찾아서 한다. 꿀벌은 다르다. 꽃의 번식을 도우며 꿀을 생산한다. 누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꽃들을 돋보이게 하면서 꿀을 생산하고 나눔을 실천한다. 어릴 적 동화책으로만 생각했던 이솝우화도, 일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큰 깨달음을 준다. 내 주변의 대부분 사람, 배터리 노동자들은 개미들이다. 또는 언젠가는 베짱이처럼 놀기 위해 개미처럼 일한다. 운이 없으면 평생 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죽는다. 하지만 꿀벌 같은 노동이야말로 의미 있는 노동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 주변에는 이미 개미도 베짱이도 아닌 친구가 있다. 그가 바로 곽정훈이다. 그는 개미도, 베짱이도 아니며 꿀벌도 아니었다. 어쩌면 새로운 종류의 곤충일지도 모른다. 그의 특별함이 느껴졌다. 문득 그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어, 정훈아. 크크. 잘 지내? 맨날 보자고만 하고 새해가 밝았네.”

“그래, 형. 요즘 어때? 쉬니까 좀 괜찮지?”


정훈이는 내가 쉬는 중에도 잊을 만하면 메시지를 보내왔다. 안부 문자였다. 어쩌면 생존 확인을 위한 문자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휴직 전의 나는 불안정했었다.


“정말 좋아. 말 나온 김에 혹시 오늘 저녁 어때?”

“그래, 다른 일정이 있었는데 비중이 작은 일이라 그것은 고이 접어서 미뤄둘게.”

“넌 말투가 한 해가 지나도 똑같다. 크크.”

“사람 변하면 죽는 거야. 크크.”

“그럼 퇴근 시간에 맞춰서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일하는 사람 퇴근하면 힘든데 쉬는 사람이 이동해야지.”

“어? 이 형 이제 사회생활 잘하네. 바로 출근해도 되겠다. 크크.”

“크크. 그럼 이따 보자.”


개미도 베짱이도 아닌 그를 만난다.


“형, 왔어?”

“그래, 쉬는 사람이 먼저 나와 있어야지.”

“머리랑 수염 뭐야? 계속 기른 거야?”

“그래, 좀 추레하지만 이때만 해볼 수 있겠다 싶어 여섯 달째 기르고 있어.”

“아니야, 멋있다. 존중한다. 형 뭐 먹을래? 쉬니까 내가 사줄게. 형은 복직하면 사줘.”


역시 쿨하지만 멋진 녀석이다.


“그럼…. 금성 대학교 중문 쪽에 시카고 피자가 땡기네.”

“좋다. 택시 불러서 가자.”


우리는 택시를 타고 금성 대학교로 이동했다. 시카고 피자집은 반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게로 내려가자 특유의 꿉꿉한 공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게다가 밖은 아직 초저녁인데 반지하의 어둠은 밖의 빛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실내 장식도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평일의 초저녁이라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학가지만, 학기 중이 아니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장님, 시카고 피자 하나랑 바이젠 오백 두 잔 주세요.”


정훈이는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마치 어제도 왔던 사람 같았다.


“와, 여기 정말 오랜만이다.”

“형, 나 사실 어제도 왔었다. 형이 얘기해서 한 번 더 온 거야.”

“뭐야? 그랬으면 얘기하지.”

“한 번 더 먹으면 어때. 괘안타.”

“그래도 그렇지. 연이틀 같은 곳을 오네.”

“괘안타. 내일 또 와도 된다. 크크.”


정훈이는 여전히 긍정적이었다.


“그래. 회사는 좀 어때? 요즘 뭐 힘든 건 없고?”

“형, 회사는 우리 없어도 잘 굴러간다. 생각할 것 없다. 그런데 힘든 게 하나 생겼다. 낮잠 자는 게 힘들어.”

“뭐야? 낮잠 자는 게 힘들 정도로 바빠?”

“그게 아니고 담이 와서. 엎드려 있으면 아프네. 나는 의자 뒤로 젖히고는 못 자겠더라고.”

“뭐야? 크크.”


정훈이는 사소한 일로 웃음을 줬다. 내게만이 아니라 주변 모두에게 그렇게 한다.


“아 맞다. 회사에 별일이 하나 생겼다.”

“뭔데?”

“우리 직급 체계를 개편하면서 직급을 통일한대.”

“그게 무슨 소리야?”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을 다 통일한대.”

“뭐야? 그러면 뭐라고 부른대?”

“그냥 이름에 님 붙여서 부른대.”

“님아, 그렇게? 크크. 졸라 어색하겠다. 안그래 정훈님아?”

“니미, 맥주나 한잔 때리자.”


[짠]


[벌컥벌컥]


“캬, 좋다.”

“그러게. 또 마셔도 좋네.”

“우와, 역시 시카고 피자야. 두께 좀 봐.”

“그래, 씹는 맛이 있지.”


외국에서는 이미 이사를 셰르파라고 하거나 비서를 중역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혹은 그냥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호칭은 일터에서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그 위계질서를 허물고 수직적인 분위기를 수평적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철수야, 너는 언제까지 회사 생활할 거냐?"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그냥 하는 거지 뭐. 안 그러면 딱히 먹고살 방법이 있나?"

"누군가 무료로 보수를 준다면?"

"그러면 일 안 하지 이 양반아. 크크."

"일하지 않고 놀면 주변에서 바라보는 눈총이 따갑지 않겠어?"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안 쓴 지 오래되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일곱 가지 큰 죄로 교만, 탐욕, 색욕, 분노, 질투, 탐식, 태만을 말했다. 그중에 일하지 않고 논다는 것은 태만에 속했다. 지금도 회사에서는 근무 태만을 이야기한다. 회사에서는 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순간 회사에서 놀 방법을 생각했다.


"철수야, 회사에서 놀 수는 없을까?"

"이 양반이 집에서 책 보면서 쉬더니 이상한 생각을 하네. 그러다 징계 먹는다."


물론 회사에서 대놓고 놀 수는 없다. 일할 때는 놀듯이 일하고, 쉴 때도 놀듯이 일하는 것이다. 결국 계속 일은 하지만 놀듯이 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이후의 노동 현장에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르네상스인이 생겼다.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고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다. 최초의 르네상스인 알베르티는 ‘삶이란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감한다. 게다가 그 일이 무의미한 일이 아니고 유의미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산업화를 겪으며 선택당하는 노동자들을 보며 위험을 경고했다. 자신을 일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르크스는 자유를 누리면서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그들의 일이 유급 노동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했었다.


"철수야, 형 없는 동안 GPW 같은 행사는 안 했어?"

"아, 그 쓸데없는 거는 반기별로 하고 있지. 이번에 다 같이 1박으로 제천 다녀왔다."

"어땠어?"

"어떻긴 드럽지. 맥주나 한잔 더 하자. 사장님, 여기 바이젠 오백 두 잔 더 주세요."


GPW란 Great Place to Work의 약자다. 내가 입사했던 신입사원 시절에도 있었고, 아마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서양에서 어떤 외국인이 만든 개념 같은데 한국에는 이상하게 가져와서 등산을 가거나, 1박으로 리조트를 간다. 물론 어디든 간다는 것은 즐거울 수 있다. 그것이 주말에 회사 사람들과 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다행스럽게 팀장이 등산이나 리조트에서의 1박에 취미가 없더라도 꼭 금요일 퇴근 후 날을 잡아서 볼링을 간단하게 즐기고 회식을 한다. 불같은 금요일에 말이다.


최근 한국 시장에 진출한 위워크(WEWORK)가 그나마도 즐거운 일터를 만들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르겠다. 위워크는 하나의 공유 사무실에서 시작해서 몇 년 만에 전 세계 수도를 중심으로 300개가 넘는 지점을 갖게 된 100억 달러의 세계적인 스타트 기업이다. 계약만 하면 지점 간 이동, 확장, 커뮤니티 환경 등 모든 것을 지원해 준다. 단순한 한 명의 개인 자리부터 단체 부스, 룸으로 된 사무실까지 다양한 맞춤형 옵션이 있다. 게다가 무제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것이 위워크의 특징이다. 업무 시간 중간에 곁에 있는 사람과 갑자기 파티도 한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서울에서 업무를 보다가 뉴욕의 맨해튼에서 업무를 이어갈 수도 있다. 그것이 진정한 GPW가 아닐까 싶다. 우린 GPW마저 정해진 틀 안에서 참여해야 하는 길들여진 노동자들이었다.


"형, 요즘 해외 축구 보나? 손흥민 엄청나게 잘한다. 내가 예언 하나 할게. 조만간 득점왕도 할 듯싶다."

"손흥민이 지금 독일에 있지?"

"이형, 세상에 정말 관심이 없네."


정훈이에게 손흥민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었다. 그만큼 그 친구는 축구광이다. 손흥민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훈련받았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충분히 활약했고,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완벽하게 적응했다고 들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그가 볼 차는 모습을 볼 때면 행복해 보였다. 그에게 일은 축구다. 좋은 인성과 실력을 갖춘 준비된 일꾼이었고 이제는 좋은 팀까지 만났다. 물 만난 물고기다.


사실 회사에도 팀이 있다. 스포츠처럼 팀워크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게다가 팀별로 경쟁을 시킨다. 심지어 생산부는 순위도 만들어서 팀별로 포상을 다르게 한다. 요즘은 인사팀에서 새로운 평가체계를 만들어서 개인별로 경쟁을 시켜놓고 업적별로 연봉을 서로 다르게 준다고 들었다. 경쟁의 경쟁 사회다. 난 이제 경쟁에서 나와 있지만, 다시 그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경쟁하고 싶지 않다. 치열하게 경쟁하더라도 직장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 신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같은 평범한 정규직 직장이든, 비정규직이든, 일용직이든, 문화예술인이든, 그게 어떤 직업이든 신념을 갖고 일하는 것은 역시 삶에 중요하다.


일의 의미를 넘어서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행복의 의미란 무엇일까. 질문이 계속 생겼다.


"철수야, 행복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형, 집에서 책만 보더니 철학자가 다 되었네."

"이렇게 맛 좋은 거 먹고 즐거우면 행복한 거지. 별거 있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다. 정훈이는 그중에 즐거움에 있어서는 모자람이 없는 친구다. 배터리 전자공학에서 말하는 OFFSET(기준치)이 있다면 그것이 낮다는 것이고, 인간의 기준치가 있다면 그것이 낮다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이 있다. 그 반대로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소소한 것에서 만족한다. 난 그 기대치를 한없이 낮추기로 했다.


어쨌든 이제 난 출근을 앞두고 있다. 복직의 날이 밝아왔다. 6개월 만의 어색한 출근이다. 더 이상 내 마음속엔 과거의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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