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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동안 안녕하지 못했다.

죽음을 체험했다.

by 부소유

"팀장님 잠시 면담 좀 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저기 빈 회의실에서 얘기합시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2 회의실로 이동했다. 그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래요. 뭔가요?"

"병가휴직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진단서는 여기 있습니다. 병명은 우울 에피소드예요."

"그래요? 기간은 얼마나?"

매우 놀라지도 않고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확 열을 받았다가 다시 침착해졌다.

"일단 두 달 사용하고 필요하면 추가하는 방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일하면서 뭐가 힘들었나 보죠?"

조병진 팀장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전혀 몰랐던 눈치다. 그것이 다시 나를 열받게 했다.

"그 하찮은 업무 하나도 못 하는 저 자신이 못마땅해서 우울했어요."

"그게 그렇게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는 끝까지 사원들의 고충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를 해치기 위한 욕망도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사원들의 어려움을 이해 못 하는 그가 불쌍했다. 리더로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리더는커녕 그의 회사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중에 그를 먼저 겪은 후배에게 들었지만, 그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남편이었고, 아들에게 무시당하는 아버지였다. 그는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었다.




병가휴직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팀장에게 진단서를 들고 얘기하는 순간 거의 80%는 된 것이었다. 진단서를 뽑아와서 서무에게 전달하고 조직의 팀장에게 면담을 하면 된다. 나머지 20%로는 그냥 신변 정리, 사무실의 짐 정리와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하면 된다.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이 너무 어색했다. 관성으로 인해서 출근 시간에 눈은 떠졌지만, 몸은 좀 더 누워있었다. 휴직 전에도 눈은 뜨게 되었지만, 몸이 움직이기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눈만 뜨고 몸을 그대로 둔 상태로 이완을 해보니 기분이 좋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명상을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볍게 우유만 한 모금 하고 산책하러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대충 눈곱만 떼고 머리도 감지 않은 채 밖을 나섰다. 면도도 하지 않았다. 헤어드라이어는커녕 빗질도 하지 않았다. 옷은 제일 편안한 운동복을 입었다. 동네에서 입던 옷이라 무릎이 튀어나오고 엉덩이가 반질반질하지만 상관없었다.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심코 무료함을 느껴서 스마트폰의 라디오 앱으로 지난 방송을 켰다. 지난 방송 중에 인기 있었던 방송들을 모두 다시 들을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넘겨보던 중에 명상에 대한 방송이 눈에 띄었다. 그 방송을 들으며 채도사라는 명상가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좋아했던 부채도사도 아니고 채도사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성이 채 씨이고 도사라는 가명을 붙인 것으로 보였다. 채도사라는 강한 인상의 이름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굉장히 여리고 울먹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발성에는 혼이 담겨있었고 나의 혼은 거의 매주 두 시간이 넘게 그녀의 영혼에 이끌렸다. 어느 순간 난 그녀의 팬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곧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특별한 명상센터를 개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색해 보니 채도사라는 이름과 서울 지역 센터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조금 미심쩍지만 더는 잃어버릴 것은 없다고 생각되었기에 전화를 걸었다.


"네, 마음재생소입니다."

"아, 거기 채도사님 계신가요?"

"저희 대표님인데 무슨 일이시죠?"

"명상에 관심이 있어서요…."

"다음 달 수강이 가능하신데 수강하실래요? 그래야 만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단 등록해 주세요."

"네, 등록해 드렸고 수강료는 수업 첫날에 납부해 주시면 됩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두 시까지 문자 안내해 드리는 주소로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갑자기 의심스러운 센터에 등록하게 되었다. 항우울제 약을 먹어서 그런지 매 순간이 멍했다. 생각도 줄어들고 고민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마음먹은 일이 생기면 즉흥적으로 실행했다. 평소의 계획적인 성향의 나답지 않았다. 평일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의심스러운 센터인 마음재생소로 가는 날이 되었다. 약을 먹고 있어서 운전이 위험하기도 하고 버스에서 그냥 넋 놓고 싶었기에 금성 버스터미널로 가서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시외버스를 결재했다. 큰 기대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냥 집에서 멍하니 있다가는 아무 소득 없이 시간만 보낼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약에 의지하며 시간만 소비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무언가 좀 허무했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마음재생소에서 그 허전한 무언가를 채우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오셨죠?"

어디선가 졸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는 졸리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추가 등록자로 전화 등록해서 왔어요."

"아, 그분이시구나. 저는 채도사입니다."


채도사라는 사람은 의외로 거구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큰 키에 우선 놀랐다. 마룻바닥에서 나와 비슷한 키로 보이니 키가 약 180센티 정도로 생각된다. 마르지만 골격이 좋아 보였다. 팔과 다리가 길고 어깨가 넓었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말이 그녀에게 어울렸다. 커다란 키에 놀라서 뒤로 주춤거리며 뒤늦게 얼굴을 봤다. 화장기 없는 하얀 피부에 큰 눈, 오뚝한 코, 얇은 입술을 갖고 있다. 눈썹 문신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눈썹이 짙어 보였다. 머리 모양은 숏컷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이시해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얼핏 보면 미소년으로 보일법한 모습이었다.


"명상을 배워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기본반을 추천해 드려요."


마음재생소는 명상센터였고 채도사는 명상 선생님이었다. 명상이라는 것이 뭐 배울 것이 있나 생각이 들었다가 그의 묘한 매력에 끌리기도 했고 여기까지 온 노력이 아까워서 두 달을 등록했다. 두 달부터 할인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기가 아닌가 의심이 되어서 구글링을 해봤고, 그녀의 라디오 채널이 이미 유명 채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 팬덤까지 있는 명상 선생님이었다.


"음…. 수업 시간은 정각 두 시에 시작할 거예요. 이쪽 방에 들어가셔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등록 절차를 위해서 30분을 일찍 왔기에 내가 1등으로 와서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방은 전체가 마룻바닥이었고 좌식 소파 의자가 20개 정도 놓여있었다. 좌식 소파 의자의 커버도 벽과 기둥의 색도 천장도 모두 하얀색이었다. 앞에는 채도사의 자리로 추정되는 자리가 바닥에서 15센티는 높게 올라와 있었다. 그 자리에도 똑같은 좌식 소파 의자가 있었다. 구석에는 커다란 화분이 있었다. 고무나무같이 보이지만 자세한 종류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는 통창으로 되어 밖이 훤하게 보였다. 통창의 밖으로 서울 강남구답지 않게 고풍스럽고 거대한 공원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선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제 생각해 보니 내가 내린 지하철역의 이름이 선릉역이었다. 조선 시대 왕릉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수강생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다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어울리며 같이 오는 공간이 아니고 오롯이 혼자 오는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중에는 분명히 채도사의 팬으로 참석한 사람도 보인다. 혹은 순수하게 마음 치료를 목적으로 온 사람도 보인다. 적은 비중으로 나처럼 우연한 계기로 한번 와본 사람도 보인다. 사람들의 성별은 대부분 여자였다. 대부분 표정이 없었다. 얼굴이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저마다 삶에서 어려움을 겪고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모습이다. 센터의 실내는 흰색 벽에 통유리창으로 해까지 떠서 더없이 밝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어두웠다. 옷차림도 명암조차 구분 안 되는 흑색으로 대충 차려입은 모습들이다. 누구 하나 제대로 갖춰 입거나 꾸미고 온 사람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 그대로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다들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다. 누구 하나 서로의 외모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도 않았다. 스무개의 좌식 소파 의자는 얼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선생님들 안녕들 하세요? 사실 세상을 살아가며 안녕하기 쉽지 않죠? 저는 채도사입니다."


채도사는 안녕하세요 라는 인삿말에 대해서 설명했다. 안녕하세요는 대한민국 특유의 인사말이다. 그 의미가 깊다. 편안한 안에 편안할 녕을 합친 단어다. 편안하시냐고 묻는 인사말이다. 또는 편안할 안에 영혼 영으로도 뜻풀이가 된다. 영혼이 편안하냐고 묻는 것이다. 단순한 인사말로 하기에는 깊이가 있는 말이다. 어원이 불분명하지만, 한자문화권에서 한반도에서만 유일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조상들이 불편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 후대에 우리는 아직도 불편하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록적인 과로사, 자살률, 행복지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결혼과 출산율의 통계 자료는 이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는 그 불편함에 지치고, 치여서 삶의 막다른 곳까지 오게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선생님들께서 여기까지 어떤 마음으로 오셨는지 제가 감히 짐작하기 쉽지 않겠지만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잠시나마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고.. 귀가하셔서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안녕한 삶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채도사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라디오 방송에서도 느꼈지만, 말을 이어가는 능력에 막힘이 없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을 스스로 짧게 소개했다.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명상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고 했다. 20대 중반부터 10년 동안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한다. 진짜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다. 계룡산이라면 금성시 근처를 말하는 것인데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인삿말은 이만하고 오늘 첫날이니까 여기 오신 선생님들 짧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드릴게요. 어떻게 오셨는지 말씀하시면 되고 말씀이 어려우시면 다음 분으로 넘기셔도 됩니다. 왼쪽 제일 앞에 분부터 시작 부탁드려요. 자, 시작."


채도사는 수강생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본인이 이 자리에서는 선생의 자격으로 앉아있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모두 누군가의 또는 각자의 선생님이라는 의미다. 선생님들은 저마다 어려움이 있었다. 대부분 가족 또는 친구,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겠다.


마음재생소는 매 주말 찾아갔다. 그 때문에 매 주말 토요일은 일정을 비워두었다. 수업이 시작할 때는 언제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성제와 팔정도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사성제는 세상살이가 고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원인을 소멸시키며 열반의 경지로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른 마음가짐을 말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만 진심으로 수행해도 깨달음을 얻을 것 같았다.


원래 천주교 모태 신앙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 처음에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게 불편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에 대한 풀이는 서서히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간단한 이론을 배우고 난 뒤에는 호흡명상을 했다. 호흡명상은 회사 상담소에서도 해봤던 것이라 익숙했다. 병가휴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명세빈 상담사와 만난 지가 좀 되었다. 그녀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고 내가 잘 지내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여전히 내 속 깊은 마음에서 그녀를 향한 사랑이 꿈틀거림에도 불구하고, 또한 불편한 양가감정이 들어서 거리를 두려고 했다. 사실 그녀의 연락처도 모른다. 그저 상담실 전화번호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내담자가 아니라 남자로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호흡명상을 마치고 나서 진행한 통찰 명상은 익숙하지 않아 어려웠다. 특정 경험을 끄집어내서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고 넘기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위빠사나라고도 말한다. 채도사가 잘 가이드를 해줘서 빠져든 적도 있고 그냥 잠에 빠져든 적도 있었다.


이완 명상은 편안했다. 호흡명상과 통찰 명상은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하는데 이완 명상은 좌식 소파 의자를 펼쳐서 모두 간격을 벌리고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몸을 최대한 이완했다. 모든 힘을 다 빼야 한다. 힘을 빼려고 하는데 가끔은 엉뚱한 곳에 힘이 자꾸 들어갔다. 가끔은 힘을 빼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그 뒤로 평소에도 힘을 빼는 연습을 했다.


"자 이제 두 달간 기본반의 수업을 수강하신 선생님들은 기본반의 수업을 모두 마치셨어요. 더 이어서 하고 싶은 분은 심화반을 신청하시면 됩니다. 난도가 급격하게 올라갈 수도 있어서 긴장하고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농담입니다. 크크. 지금까지 하신 것처럼 편안하게 오시면 됩니다."


채도사는 가끔은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농담도 하곤 했지만, 표정 없는 사람들이 많이 웃지는 않아서 채도사가 무안해하곤 했다. 그러나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기본반 수업이 마무리되면서 표정 없던 사람들의 표정이 생기고 있었다. 몇몇 선생님들은 채도사에게 과일이나 간식을 주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남을 챙긴다는 것은 내가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물론 나도 점점 회사 생활에서 쌓였던 피로와 번뇌가 풀리고 있었다. 육신뿐만 아니라 정신도 이완되고 있었다. 약을 먹고 있어서 그런 점도 있지만, 명상이 내게 주는 기분은 또 새로운 차원의 것이었다.


심화반의 이론교육은 주역 수업이 주로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공부했다는 사서삼경으로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시경, 서경, 역경 중의 역경이다. 우리는 인생의 역경을 극복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역경을 64개로 풀어쓴 것이 주역이다. 그 기원이 기원전 1000년인 고대국가 주나라 시절의 문왕의 아들 주공이 지었다고 하니 인생의 어려움은 인류사 수천 년간 있었던 것 같다. 주역은 우주를 체계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 역학이며 만물의 원리와 이치를 담은 철학서이다. 더불어 마음 수양을 하는 치유의 책이고 하나의 학문이다. 워낙에 고대 학문이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데 채도사의 해석이 궁금했다.


"주역은 64개의 궤로 구성되어 있어요. 64개의 이야기에서 인간이 겪는 고집멸도, 희로애락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역을 통해서 오늘은 선생님들에게 용을 타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주역이 어렵다면 한없이 어려울 수 있는 학문인데, 채도사는 실제 사람들의 경험과 장자 철학, 영화, 드라마, 최신 뉴스에서 다양하게 사례들을 가져와서 그녀만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우리에게 쉽게 풀어 설명해 줬다. 주역이라는 학문에 매료되면서 세상을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고 귀가해서도 주역을 공부했다. 먹고살기 위한 미시적인 방법론적인 책만 보며 공부하다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주와 인생을 논하는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이 마음을 평안하게 해줬다. 난 안녕해지고 있었다.


주역을 배운 뒤에는 심화 명상을 실습했다. 차 명상을 하면서 짧게 다도를 배웠다. 잘 끓인 물과 좋은 차를 이용해서 차를 만들었다. 간이 알맞게 된 차를 마시는 순간 그 부드러운 목 넘김에 이어서 입과 코에 퍼지는 맛과 향이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정말 평범하지만 평화롭고 안정적인 명상이었다.


항명상은 천연 에센셜 오일로 만들어진 향수를 사용했다. 자연에서 얻어진 향료들이 숙성되어 만들어진 향기는 새로운 감정을 일깨워줬다. 과일의 향기, 꽃의 향기 다양한 향기가 느껴졌다. 새로운 영감, 새로운 사색으로 선생님들을 이끌어줬다.


걷기 명상은 역동적인 명상이었다. 창밖으로 바라보던 선정릉을 걸었다. 한 시간 걷고 오는 것이 과제였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비우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그냥 넘겨야 한다. 흙을 밟는 발의 느낌과 나무와 풀의 냄새도 맡고 넘겨야 한다. 목적은 없다. 그저 스스로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오늘은 좀 특별한 명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죽음 명상입니다. 제가 선생님들을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크크. 먼저 이완 명상을 할 때와 같이 편안하게 누워주시겠습니다."


모두는 의심 없이 채도사의 가이드에 따라 행동했다. 기본반에서는 가끔 수업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공격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심화반까지 올라오면 누구나 의심 없이 채도사를 따른다. 이번에는 과연 무엇을 할지 상상이 안 되는 죽음 명상이라는 것을 하는 날이 되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죽을 거예요. 진짜 죽는 것은 아니고 죽는다는 상황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여러분은 죽음을 앞두고 어떤 장소에 있나요? 그리고 주변에는 누가 있나요. 한번 상황을 그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싱잉볼을 치면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딩.. 딩.. 딩]


싱잉볼이 울렸다. 갑자기 정말 죽는 것 같이 몸에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며 육신이 바닥 저 깊은 지하실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기분을 느끼다가 쿵 하는 충격을 느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육신과 정신이 분리되는 기분을 느꼈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몸만 뜨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분명히 눈을 감고 있는데 주변이 느껴지더니 보이기 시작했다.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정 부분은 선명했다. 선명함을 넘어 초음파나 방사선 같은 투시 광선을 이용해서 사물을 관통해 보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내 육신이 보였다. 내 육신은 이곳 센터의 마루에 누워있었다. 그 육신을 보고 있는 높이가 꽤 높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임사체험을 하듯 명상을 하라고 했더니 유체이탈을 해버린 것이다. 약을 먹는 것으로 인한 환각 작용일까 싶기에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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