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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Sep 29. 2024

유연한 직원이 되기로 선택했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만들 것이다.

대한민국 기업에 새로운 제도가 생겼다. 이름하여 유연 근로시간 제도. 그동안 정해졌던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출퇴근 시간과 하루의 근로시간을 노동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금성전자는 최근 성과금 사건을 계기로 언론을 의식하는 회사가 되었다. 곧바로 직원들의 워라밸을 챙겨준다는 명목으로 제도를 즉시 도입하고 언론홍보팀을 통해 뉴스로 내보냈다. 이 제도는 일주일에 40시간, 4주에 160시간을 자율적으로 채우는 제도다. 심지어 한 주에 20시간을 근무했다면 4주 안에 모자란 20시간을 채우면 된다. 이 제도는 대기업부터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눈치를 봤다. 나는 시행 첫 주에 과감하게 아침 아홉 시가 넘어서 출근했다. 거의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출근했다. 어느 날 문희준 팀장이 불렀다.


“칠수야, 니 나랑 빈 회의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얘기 좀 하자.”


문희준 팀장은 경상도 사람인데 함께 생활하며 조금 친분이 생기자 나를 그냥 칠수라고 불렀다. 친구도 아니고 그런 호칭이 기분 나쁠 만하지만, 친분의 표시로 생각했다. 회의실에 먼저 들어가 앉아있는 팀장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잔소리를 하려는 예감이 든다.


“칠수야, 니 출근 좀 늦게 하더라?”

역시 팀장은 옛날 사람이라서 출근 시간을 민감하게 생각했다.

“네, 유연근무 제도에 맞춰서 늦게 나와서 늦게 퇴근하고 있어요.”


당당하게 대답했다.


“끄음, 니 주중에 두 세번은 일찍 출근하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일찍 출근하고 있고 우리는 현장이 같은 팀이라서 현장에서도 보는 눈이 많아서 말 나온다.”


팀장이 말했다. 그는 원래 말이 논리가 있었는데 이번에 말하는 잔소리에는 논리가 없다. 사회와 기업에서 권장하는 유연근무 제도를 원칙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보기 불편한 모습을 그저 투정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현장에서 보는 눈이 많다는 이유도 조금 뜬금없다. 구태여 이른 아침 시간에 현장에서 사무실을 찾는 경우는 일 년에 한 번이 있을까 말까 한 긴급한 상황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는 모습이 보기 불편하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한 귀로 흘려버릴까 싶다가 팀장의 의견을 존중하고 한발 양보하기로 생각했다. 주중에 두 번만 조금 일찍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나머지는 지금보다도 더 늦은 오전 열 시에 출근하기로 했다. 하나를 양보하는 대신 나머지를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 뒤로 팀장은 출근 시간에 계속 뭔가 불편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딱히 더 이상 출근 시간을 갖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출퇴근 시간을 마음먹은 대로 조정하자 세상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몇 주, 몇 달이 지나도 대부분의 직원들은 여전히 과거의 관습대로 아침 일찍 출근해서 야근하거나 저녁에 퇴근한다. 제도가 시행되었지만, 누구도 강제하고 있지 않고 자율적으로 하고 있기에 서로들 눈치만 보고 있다. 우리 팀에도 나를 포함한 박선준만 과감하게 유연근무를 활용 중이다. 예를 들어 일주일만 기준으로 했을 경우 목요일까지 36시간을 근무했다면 금요일에는 4시간만 일하고 퇴근하고 있다. 예전이었다면 반차 휴가를 사용해야 하는데 반나절 근무하고 그냥 퇴근할 수 있다.


“어? 선준이 어디 갔지? 휴가입니까?”

팀의 대선배인 문성근이 어느 금요일 이른 오후에 내게 물었다.

“아, 유연근무로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했어요.”

내가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문성근은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문성근은 팀의 유일한 부장급이다. 예전 직책으로는 과차장급인 문희준 팀장보다도 10년이나 선배다. 최근에는 이렇게 팀원보다 젊은 팀장의 임명이 보편적으로 되었다. 어쨌든 문성근은 25년간 기업의 전통적인 출퇴근 시간에 얽매여있다. 꼭 그 시간에 출퇴근해야 한다는 관념이 완전한 습이 되어있다. 그에게는 새로운 근무 형태는 너무나도 어색해 보인다. 그는 언제나 아침 일곱 시 반에 출근해서 업무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15년 차가 넘어가는 문희준 팀장도 마찬가지다. 그 뒤로도 한동안 문성근은 내게 금요일 오후가 될 때마다 박선준이 퇴근했냐고 물었다.




“칠수야, 점심 식사하자. 애들 다 연락 돌려서 로비에서 모이자고 하자.”


팀장이 말했다. 문득 점심을 먹기가 싫었다. 난 이제 늦게 출근하는 형태가 습이 되어서 열 시 출근 후 가볍게 우유를 하나 마시고 있다. 빈속에 갑자기 차가운 우유를 들이켜서 그것의 소화가 잘 안 되었는지 오늘따라 속이 더부룩한 상태다.


“저 팀장님, 오늘은 속이 좀 불편해서 점심 식사 안 먹으려고요."

팀장에게 말했다.


“그래? 어쩌다가? 그래, 그럼 칠수는 속 좀 달래주면서 쉬고, 저기 선준아, 애들 연락 돌려서 로비에서 모이자고 해라.”


팀장이 옆에 있는 박선준에게 말했다.

“네? 아, 네.”


박선준은 한 번 못 알아들은 척하더니 다시 알아들은 모습으로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회사는 식사하지 못하는 직원에게 빵과 우유를 제공했다. 그 복지가 점점 좋아져서 간편식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음료, 주스, 컵라면, 과자, 즉석요리, 과일, 샐러드, 김밥 등 다양한 대체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선택지가 많아졌다. 게다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모든 식사 시간마다 운영한다. 원칙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식사가 어려운 직원에게 식사 시간 전후로 대체 음식을 제공하는 복지다. 그것이 지금은 수많은 직원이 이용하는 정식 코너가 되었다. 예를 들어 식당이 11:30부터 13:30까지 운영하면 간편식은 11:00~14:00 사이에 언제든 수령이 가능하다. 난 딱히 급하게 먹을 필요가 없어서 여유 있게 13:30에 수령하기로 마음먹었다.


12:00, 사무실 직원 모두가 식당에 가서 조용했다. 조용했다기보다는 고요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는 시끄러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무실의 공조 소리만 내 귓가에 맴돌고 있다. 공허하다. 문득, 휴직 중 독서를 하던 시기의 깨달음이 떠오른다. 세계의 존재와 배터리를 내부에 존재하는 양자 물질, 존재성이 의심되는 반물질과 암흑물질, 반야심경에서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동서양의 과학 철학을 읽고 탐색하다 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모두 결국 공이라는 부분이다. 이 공허하고 허무한 사무실 공간을 인류를 가장한 공들이 채우고 있다. 인류는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을 정리했고, 절묘하게도 배터리에 정공이라는 허상을 채워 제품으로 판매한다.


문득 복직과 동시에 팀을 이동하고 독서를 등한시했다는 죄책감으로 내 낡은 서랍 속에서 먼지 쌓인 어떤 책을 꺼냈다. 지난날 힘들었던 시절에 닳도록 읽던 장자 철학책이다. 이 거대한 책은 언제나 내 서랍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양장본으로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벽돌 디자인 또한 거대하지만, 사실은 그 내용이 거대하다. 불현듯 놓치고 있던 독서의 끈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상념은 지난날 니체의 책을 읽고 어린아이로 만들어준 나에 대한 기억을 깨워주고 있다. 마침내 결심했다. 앞으로 이 점심시간은 온전하게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칠수야, 밥 먹자.”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자 팀장이 내게 또 말했다.

“저는 앞으로 점심에 간편식으로 샐러드를 받아서 나중에 먹으려고요.”

내가 대답했다.

“아니 왜, 사람이 밥을 먹고 밥심으로 일해야지 그런 풀떼기만 먹어서 쓰나.”

팀장이 말했다.

“점심을 먹으면 속이 편하지 않아서 앞으로 점심은 가볍게 가려고요.”

난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끄흠…. 그래, 알았다. 나중에 저녁이라도 잘 챙겨 먹어.”


팀장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확보했다. 이제 점심시간은 내 마음대로 누리는 시간이다. 낮잠 자거나 산책을 해도 되고 또는 그냥 놀아도 된다. 이 시간에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요즘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신경을 쓰느라 독서를 하던 시간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물리적인 시간이 줄어들면서 초병렬 독서까지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권을 읽어내기 버거운 상황이다. 어쩐지 요즘 마음이 답답하고 무언가 생각이 멈춰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독서가 느려진 까닭이다.


이제 점심시간은 독서 몰입의 시간이다. 가끔 내 속의 허기가 찾아와 식사를 요구하지만 물 한 잔하며 그 허기를 살살 달래주고 있다. 그리고 그 허기는 다소 상투적이고, 통념적인 표현이지만 마음의 양식으로 채운다. 덤으로 자연스러운 간헐적 단식도 체험한다. 한동안은 여러 동료가 내게 점심을 먹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동료들의 나에 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번 대답해 주었더니 어느새 난 점심을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점심에 마음껏 뇌 근육을 사용하며 배터리 교양책도 여러 권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업무적으로도 여러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배터리 기술이 고집적화되면서 앞으로 필요한 개발 장비나 현재 장비의 개조에 관한 생각이다. 다른 부서 직원들의 의견도 수렴했다. 곧바로 자료를 정리해서 팀장에게 보고했다.




“칠수야, 이거 준비해야겠네. 내가 도와줄게."

문희준 팀장은 조금은 꼰대 같기는 해도 합리적인 사람이다. 팀장은 곧바로 윗선에 근거 자료를 올려서 투자 금액을 가져왔다.

“칠수야, 내가 윗선에 얘기해서 50억 가져왔다. 어때 통 크지? 지금 마침 배터리 경기가 좋아서 생각보다 잘해주네. 투자는 이럴 때 해야 해. 정말 잘 준비했다.”

투자를 위해서 받아온 금액은 바로 장비 투자에 사용했다. 테스트 그룹에서 이미 사용해 본 장비를 투자하는 셈이 되어서 준비가 어렵지는 않다. 단, 투자에 경험이 없어서 팀 내 투자 경험이 있는 선배 고천수에게 자문했다.


“이야…. 너, 이 녀석 개인적으로 이 정도 규모의 투자 금액을 가져오다니 보기보다 굉장한데?”

고천수는 감탄하며 내게 말했다. 고천수는 내게 구매요청서 작성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장비를 투자하는 일로 끝내지 않고 다른 부서에서 수렴했던 의견을 기억해서 기존 장비의 개조도 병행했다. 특정 장비에서 제품을 구동할 때 고온에서는 잘 되는데 저온에서 하면 결로가 생기는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비 업체와 몇 차례 회의하고 논문을 찾아서 결로가 생기는 문제를 해결했다. 설비를 최대한 진공상태를 만들고 실리콘의 열전도를 이용한 다음 인체에 무해한 질소 Gas를 넣어 산소를 줄여서 해결했다. 본 장비 개조 건으로 그룹에서 포상을 받고 발표도 하게 되었다.


“… 이렇게 세계 최초로 저온 조건에서 결로 현상 없이 배터리 테스트가 동작하는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발표할 때 조금 긴장은 되었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를 즐기며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이렇게까지 인정을 받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내가 하긴 했어도 결과가 조금은 과분한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칠수야, 얘기 좀 하자.”

문희준 팀장이 조용히 불렀다.


“칠수 니가 우리 현장을.. 나중을 생각해서 크게 공사 한번 해야겠다. 칠수, 니가 이번 기회에 TF장 직책도 좀 수행하면서 니한테 현장 공사와 추가 투자를 좀 맡기고 싶네.”

실로 놀라운 제안이다. 야망이 있는 직원들은 누구나 TF장이라는 직책을 하고 싶어 한다. TF장은 팀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팀장 다음은 기업의 별이라고 부르는 임원이다. 별을 달기 위해 누구나 TF장부터 하고 싶어 하고 그 후 절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된다. 대부분 직책을 달고 괴물이 되어버리는 이유다. 직책자들의 나이가 점차 젊어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TF장이라는 자리부터는 불혹의 나이가 훌쩍 넘어가는 과차장급 기성세대가 맡아서 수행해야 하는 분위기다. 그 자리를 사원급인 내게 제안하는 지금 상황은 파격적인 제안이다. 게다가 블랙리스트인 내게 이런 제안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더욱이 이런 거대기업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칠수야, 니 고민이가? 니 걱정되나? 현장 운영에 인사권도 주고, 내가 많이 도와줄게. 벌써 상무님 허락도 받아놔서 안 된다고 하면 내 입장이 곤란해. 나 살려주는 셈 치고 맡아줘.”


문희준 팀장은 좀 더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내 대답을 듣기를 원한다. 난 그저 생각한 대로 유연한 사고를 갖고 움직였을 뿐인데 회사가 나를 원하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TF장을 하면 유연한 삶에서 멀어질 것이 염려되어 우려의 씨앗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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