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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칠 때 떠나자.

인정과 관심을 뒤로 하고..

by 부소유

"과분한 자리를 제안해 주셔서 부담은 되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팀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요. 잘해봅시다."


TF장 직책을 달고 현장을 방문했다. 모두의 달라진 눈빛이 느껴진다. 개복치와 대장군이 눈인사를 하며 길을 비켜준다. 그 외에 모든 현장 사원이 내가 가는 길목에서 마주칠 때면 먼저 눈인사하거나 인사를 건넨다. 현장 사무실에 들어가자 반장이 일어나서 앞으로 나왔다.


"T.. TF장님 오셨어요?"

반장이 평소답지 않게 두 손을 모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조만간 현장의 위험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자동화 가능할 수 있도록 장비를 투자하고 현장 공사를 진행해야 해요. 제가 예정되는 장비를 메일로 전달드릴 테니 반장님께서 현장의 입장에서 몇 가지 도면을 그려주시고 같이 이야기해 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해야 하죠?"

"윗선의 지시사항이라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반장은 본인이 만족스러운 도면을 그려내기 위해서 며칠 내내 밤늦게까지 야근했다. 밖에서 보면 잘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완벽주의자에 행동파다. 초안은 대충 그려내도 될 텐데 현장을 줄자로 실측하면서 자세한 도면을 그려내려고 애를 쓴다. 내가 볼 때마다 땀을 흘리며 밥도 거르며 도면을 그리고 있다. 사실 도면을 내가 그려내도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일부러 나서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업무가 생기면 더 잘하는 사람 혹은 더 잘할 것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그렇게 마음먹고 업무를 분산시켜 두니 마음이 편하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어려우면 부탁하면 된다. 안 되겠으면 안 되겠다고 말하면 된다. 많은 짐을 짊어지고 혼자 이끌어나가는 행동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과거에 그렇게 해봤지만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미련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도면은 사흘 만에 전달받았다.


"자, 한번 프로젝터로 띄워서 같이 볼까요?"


반장과 도면을 확인했다. 캐드를 배운 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어서 엑셀로 그려낸 모양이다. 직사각형의 셀을 일일이 줄여서 정사각형으로 만들었다. 그 정사각형을 좌우 1m로 생각해서 실측 결과와 눈높이를 최대한 비슷하게 맞춘 도면을 그려냈다. 잘 모르고 보면 엉성하다. 하지만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려내듯이 한 걸음씩 직접 움직이며 땀 흘리며 그려낸 현장감 있는 도면이다. 애초에 엑셀의 용도가 도면을 그려내는 목적이 아닌데, 엑셀로 이렇게까지 그려냈다는 것이 놀랍다. 반장의 얼굴을 확인하자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애쓰며 그려냈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다.


"수고하셨어요. 이 도면으로 인프라팀에 요청해서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짧게 말했다.

"네? 별다른 의견 없으시고요?"

반장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 도면은 현상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요. 이제 인프라팀들과 협의하고 조율하며 맞춰가면 됩니다."

짧게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장 사무실에서 나왔다.


[쿵]


현장 사무실을 뒤로하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현장 사원들이 우르르 사무실로 들어갔다.

"반장님! 형님! 형님!"


현장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반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다. 역시나 최근에 무리했던 모양이다.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지난날 본인이 무시했던 내가 갑자기 본인보다 윗자리에 올라와 버렸으니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신을 스스로 불태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완벽주의 성격으로 인해서 과도한 힘을 소비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도 그렇게까지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반장은 스스로 본인을 하얗게 불태웠다. 문득 과거의 내가 생각났다. 나 역시 자신을 스스로 불태웠고 결국 소진되어 번아웃에 빠졌다. 지금의 난 과거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심리적인 공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유인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자기를 불태워 소진하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 인류애의 마음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내가 도울 수 있을지 고민도 된다. 일단 지금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 빨리 보건팀 연락하셔서 대응하시죠. 은수씨가 빨리 연락 돌려주세요."


안전팀과 보건팀 사람들이 바로 출동해서 현장 상황을 정리해주고 있다. 안전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황을 묻고 있고, 보건팀 사람들은 들것을 가져와서 반장을 실어 가고 있다.


"모두 진정하고 업무 복귀해 주세요."


난 상황을 진정시키고 사무실로 이동했다. 팀장에게 반장이 쓰러진 이야기를 보고하고 현장 확장 도면을 전달했다.


"엑셀로 이렇게 그린 도면은 처음 보네. 이 도면대로 일단 추진해 봅시다. 수고했고, 반장도 나중에 수고했다고 전해줘요."




반장에게 수고했다는 말은 전할 수 없었다. 반장은 뇌졸중으로 판정받아 휴직을 사용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작년에 반장이라는 자리를 맡기 시작하면서 그의 뇌혈관은 언제나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뻘겋게 닳아 올라 있었고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주 두통을 호소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사소한 일에도 화가 많아지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분을 삭였다고 한다. 그녀의 책상 위 흐트러진 동전과 주먹으로 맞아 까맣게 빛이 바랜 부분이 그동안의 화를 보여준다. 그의 뇌혈관은 결국 그 화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잘 회복해서 스스로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고 비로소 자유를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현장 반장을 변경하면 좋겠어요."


난 팀장에게 현장의 선임자들이 그동안 현장을 장악하고 무차별 폭언을 했던 이야기를 했고, 선임자들이 현장 사원 간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을 방관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반장의 불도저 같은 리더십은 저마다 자존심이 강했던 현장 사람들을 장악하기에는 완벽했다. 그러나 몇 달간 지켜본 결과 현장 사원을 위협하는 언어폭력이나 엄격한 위계질서를 빙자한 상명하복의 문화는 강자들을 앞세워서 약자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TF장을 하면서 만들고 싶은 한 가지 문화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약자들을 자유롭게 해방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 반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통합의 리더십이 있었다면 이제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진 사람과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그래요. 내가 고TF장에게 인사권도 위임했으니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문희준 팀장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칠수라고 부르지 않고 TF장이라고 부르며 존칭을 해주고 있다. 직책과 권한을 받으면서 그와 동시에 존중을 받는다는 기분이 든다. 팀장은 내년 투자를 위한 50억의 비용을 내게 더 가져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현장의 확장 공사를 하고 차세대 제품 개발을 위한 최고의 현장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인프라팀을 주축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배터리 사업부 내 건축팀, 배관팀, 공조팀, 전기팀, 가스팀 실무자가 모두 모였다. 그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배터리 업계에서 보던 외모가 아니었다. 마치 외부 건설회사, 철강회사에서 보던 선이 굵은 남자들의 외모다. 과장해서 생각하면 건설 현장의 십장들이 모인 기분이 든다.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설명회 개념의 발표를 시작했다.


"... 자, 이런 목적으로 분석 현장의 규모 있는 확장 및 리모델링 공사를 해야 합니다. 다른 업무로 바쁘신 와중에 어려우시겠지만 많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내가 공사의 배경과 목적에 관해 설명하는 발표를 마무리했다. 다소 긴장은 되지만 천천히 말하며 모두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따, 시방 내용을 쭉 듣고 보아하니 현장을 엔간히 뜯어 고쳐야하는디요. 이 정도 규모의 리모델링 공사는 저도 처음인디…. 여하튼 우리 건축팀을 주축으로 나머지 설비 부서분들이 삐대지 말고 우덜과 맞춰서 도와주시면 한 달 안에 가능해 보입니다."


여기서 제일 입김이 강할 것으로 보이는 건축팀 실무자가 말했다. 제일 인상도 강하고 목소리도 힘이 있는 그가 구수한 전라도 억양으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실 누구나 재무적인 준비가 제일 힘들다. 하지만 비용을 미리 준비해 두고 공사의 방향까지 제시한 상황이다. 따라서 실무자들은 호흡을 맞춰서 일정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공사 기간 안전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며 외부 인력을 통제하고 매일 공사의 관리 감독에 신경을 쓰고 있다. 공사의 공백 기간에는 장비 투자와 설치에 집중했고, 그 사이사이에 현장 인원들의 집중 면담을 병행했다.


현장 면담은 철저하게 상담 형식으로 진행했다. 읽어낸 책 중에 심리학, 상담학, 소통에 대한 독서 경험을 활용했다. MBTI를 활용한 유형별 성격 확인과 카드를 활용한 알아차림에 대한 상담은 특히 후기가 좋았다. 거부감이 없는 파트원들에게는 타로와 사주 명리도 해석해 주고 있다. 그동안 거리감이 있던 현장직들과 사무직인 나 사이에 정서적인 교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독서를 통해 얻은 넓고 얕은 지식을 통해서 그들 모두에게 자유를 사유하도록 독려해 주고 있다.


그들을 달래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혐오하고 있었다. 노동조합과 인사팀은 그들의 내부고발로 인해서 언제나 분주했다. 나 또한 몇 번을 참고인으로 불려 가서 조사에 임했다. 결국 노동조합과 인사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노동조합은 본인들의 밥그릇 싸움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인사팀은 노동자들의 고발을 그저 업무로 빨리 수습하고 처리하려고 했다. 누구도 진심으로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결국 그들을 달래줘야 하는 일이 내 몫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달래주기를 바라는 삶으로 살다가 내가 누군가를 달래주는 상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현장 면담이 끝나자 생산부에 있을 때의 인연으로 알고 지낸 후배들, 테스트 그룹의 후배들이 돌아가면서 차를 한잔하자고 연락이 왔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조직을 떠돌다가 별안간 미전실에서 TF장으로 자리 잡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것에 이끌려 나를 찾기 시작했다. 심할 때는 하루 여덟 시간의 근무시간 중에 네 시간을 상담시간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들 모두는 저마다 서사가 있었고 누군가 그 서사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난 그들의 서사를 듣고 감탄하며 소감을 말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TF장으로 면담과 공사 관리 감독, 투자, 운영을 주도하며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현장 공사는 한 달만에 단 한건의 사고도 없이 완벽하게 끝났다. 차세대 제품의 분석과 개발을 위한 최고의 환경을 만들었다. 이제는 지난 시간 동안 멸시받아 모멸감에 빠져 살았던 고철수가 어디 있었냐는 듯이 여기저기서 인정을 받고 관심을 받는 직원이 되었다. 복도를 걸으면 많은 직원이 눈인사해 주었고 나 또한 눈인사로 답을 했다. 대부분의 큰일이 수습되었다. 문득 이제 TF장으로 수행할 역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팀장을 불러서 마음속에서 맴돌고 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저 이제 TF장 자리를 내려놓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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