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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치유했다.

자유를 향하여.

by 부소유

즉흥적으로 제주도행 항공권을 끊었다. 그저 육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따뜻한 남쪽 세계는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이상향을 꿈꾸는 장소다. 차가운 기운의 북쪽 세계는 소비하는 인간들에게 양보하려고 한다. 왠지 모르게 남쪽 제주도 땅으로부터 좋은 기운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은 휴직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삶을 조율하는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로 했다.


공항은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 마치 진화를 역행하고 있는 유인원들처럼 기형적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하던 일들이 줄어들고 있다. 그저 고개 숙인 채로 어딘가로 걷고 있다. 사람들은, 인류는 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목적을 알고 가는 것인지 궁금하다. 4차 산업은 문명을 발전시켜주고 있지만, 어쩌면 인류를 더 빠른 속도로 기술의 노예로 종속시키고 있다.


“어? 너 철수 아니냐?”


그때 어떤 장발의 사나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 준현이 형?”


거의 10년 전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 생산부의 첫 팀에서 쫓겨난 뒤 두 번째 팀에서 만났던 선배다.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장발의 남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잘생긴 중년의 영화배우 같다.


“그래그래. 철수 맞구나. 너 지금 시간에 혼자 공항에는 무슨 일이야? 휴가?”


권준현 선배는 여전히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다. 밖에서 만나게 되니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난 그동안 테스트 그룹에서 지낸 경험과 병가 휴직을 했던 아픈 경험을 얘기하고 현재 미전실에서 자기계발 휴직을 사용하게 된 상황을 짧게 이야기했다.


“우와, 고생했네. 마음고생 많았겠어. 난 지금 육아휴직 중. 제주살이 중이야. 아내랑 아기는 제주도에 있는데 난 잠깐 육지에 볼일이 생겨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중.”


“좋네요. 요즘은 회사에서도 남자 육아휴직을 장려하고 있죠.”


“회사 얘기는 말자. 장려하고 그래 놓고 나 진급 누락시켰어. 짜증 나서 6개월만 사용하려고 하다가 6개월 연장했어. 이참에 제주도에 정말로 푸드트럭 하나 차리려고 아내 설득 중. 부산이 아니고 제주도로 바꿨어. 남쪽으로 더 내려갔네. 크크. 야, 우리 제주행 같은 비행기 같은데 슬슬 탑승구 쪽으로 이동하자. 정말 이런 우연이 있나.”


과연 권준현 선배다웠다. 우린 탑승구로 걸어가며 그동안 지낸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는 회사 얘기하기 싫다고 하더니 결국 회사 얘기를 먼저 꺼냈다. 나를 괴롭혔던 대부분의 선배들은 똑같이 후배들에게 무시당하고, 따돌림을 당해서 다른 팀으로 옮겼고 고생한다고 들었다.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새로운 공장이 매년 건설되고 있어서 후배들은 각자 다들 흩어져서 고생한다고 한다.


“야, 정말 회사 얘기는 그만하자. 철수 너 근데 야구 이제 어디 응원하냐 와이번스는 야구단 팔아치웠던데? 자이언츠로 와라. 남자는 자이언츠야.”


“아, 저는 이제는 이글스 응원하려고요. 사실 김 감독에게 반했어요. 저는 언더독이 좋아요.”


“너 와이번스 왕조 시절에 우승 맛 좀 봤다고 이제 일부러 고생하는구나. 존중한다.”


사실 일부러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남자는 이거, 여자는 이거라고 정의해도 나는 내가 선택하고 싶었다. 게다가 소위 확률이 높다거나, 안정적이면서, 재미를 준다고 하는 방향으로 같은 선택을 하기 싫었다. 그들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싶었다.


[위이이잉]


비행기가 뜬다. 인간은 비행기를 띄우며 능동적으로 비행했다. 비행기를 띄우기 전에는 열기구를 이용해 바람이 흐르는 방향대로 까다로운 기후의 조건을 고려해서 비행했다. 하지만 인간은 다시 수동적으로 비행기에 이끌려서, 닭장 속의 암탉이 되어 그들의 시간을 빠르게 소진한다. 슬프게도 인간은 노력 없이 선택되는 상황에 익숙해졌다.


비행기의 조그마한 타원형의 창문 밖의 육지가 점점 작아진다. 고도가 높아지며 인간은 물론이고 자동차나 버스도 잘 보이지 않는다. 건물마저도 점으로 보인다. 찰리 채플린이 했던 명언인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이 다시 한번 와닿는 순간이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정말 덧없다는 기분을 느낀다. 왜 나는 배터리 업계에 와서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사람들을 만나 고생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사실 선택을 배운 경험이 없다. 학창 시절 친구들 따라서 이과를 선택했다. 대학교는 취업이 잘된다고 들어서 이공계 전자과를 선택했다. 대기업을 가야 좋다고 해서 배터리 대기업을 선택했다. 선택은 여기서 멈췄다. 선택이 나를 이끌었는지 내가 선택을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피터 비에리는 [외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얻고 내적으로 사고와 경험과 의지에 있어서 내가 되고 싶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자기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부분 인간은 자기결정을 하지 못한 채 일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전 세계 배터리 업계에는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충전과 방전사이에서 매일 사투한다. 그 속에서 그들은 2진법의 노예가 되어서 0이냐 1이냐를 논하며 서로 다른 시선으로 경쟁한다. 배터리 테스트를 하면서 0 상태로 존재했다가 1이 되어버리는 현상을 확인한 순간, 이 순간을 정의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현상을 정의하기 위해 애쓴다. 배터리의 기본이 되는 옴의 법칙부터 시작해서 양자물리학까지 과학자들이 정의하고 관찰했다. 0 상태에서 1이 되어버린 현상을 업계에서는 [힐링] 되었다고 부른다. 모순이지만 인간은 배터리에 치유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치유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나는 지금 스스로 그 치유를 선택했다. 셀프치유라고 말하고 싶다.


[기이이잉]


상념에 빠져있던 사이 제주에 무사히 착륙했다. 문득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나를 치유해주었던 그녀, 그녀가 계속 마음속에 있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하려고 한다. 내담자가 아니고, 남자로 그녀에게 연락하려고 한다. 난 그녀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리링]


“네 상담사 명세빈 입니다.”


-끝.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에필로그를 작성해서 올리고, 본 장편소설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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