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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조율하는 조율자

진정한 워라밸러다.

by 부소유

"칠수야, 무슨 일이야?"


문희준 팀장은 놀라서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며 되물었다. 그의 얼굴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운 표정이 함께 얽혀있었다.


"저 자기계발 휴직 좀 사용하려고요."




회사는 최근 자기계발 휴직 제도를 도입했다. 최대 1년을 사용할 수 있고, 6개월씩 나누어서 사용해도 된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새로운 세대들이 너도나도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다. 노동자로서는 그것을 실현하는 기회를 주면서, 회사의 측면에서는 인건비를 아끼기 위한 제도로 보인다. 배터리 사업은 호황을 지나 어느덧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점점 긴축재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 이렇게 새로운 휴직 제도를 만들 정도로 회사의 분위기가 바뀐 모습을 보면, 재빠르게 투자를 이끌어서 장비 투자와 공사를 해낸 경험들은 신의 한 수였다. 회사는 학위 취득, 어학연수 등 부족한 공부를 하거나 세계 일주처럼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예시를 보여주며 꾸준히 직원들에게 자기계발 휴직을 독려했다.


회사는 언론 플레이도 뛰어난 회사다. [워라밸을 잡고 창의적인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본 제도를 도입했다]와 같은 제목으로 각종 언론 매체에 기사화를 위해 보도 자료와 참고 자료를 넘겼다. 얼핏 처음 들었을 때는 퇴직을 앞둔 부장님이 제2의 인생을 찾기 위한 시간을 벌어주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입사 후 만 3년을 넘긴 모든 직원이 사용할 수 있고, 인사고과에 불이익도 없다. 휴직 기간에 어떤 일을 하는지 검사를 하거나 간섭하지도 않는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 물론 아쉽게도 월급이 나오지는 않는다. 경제적인 여유만 있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공부하는 직장인을 말하는 ‘샐러던트(salary man + student)’는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고, 취미에 빠진 '문센족(문화센터족)’은 취미를 보다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시대가 웰빙(Well-being)의 시대에서 자기계발의 시대로 전환되며, 바쁜 시간을 쪼개어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는 제도다.




"칠수야, 니 지금 그 휴직하면 진급이라든지 어려울 수 있고, 지금 니 자리를 내가 지켜줄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어. 니가 요즘에 수고를 많이 해서 힘들다는 건 알겠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주면 안 되겠나. 니 이제 연차가 10년차가 넘었는데 아직 사원이라는 게 말도 안 되고.. 이번에 내가 반드시 니를 사원에서 대리로 진급시켜 주려고 내가 얼마나 상무님에게 니 얘기를 했는데. 니 이렇게 휴직해 버리면 의미 없어."


회사는 TF장이라는 특별한 직책과 팀장과 임원을 제외한 모든 직급을 통합했지만, 본인의 인사 정보에 접속하면 본인만 알게 되는 등급은 있다. 난 G1이다. GRADE의 약자인 것 같다. 아마도 사원은 G1이고, 대리는 G2, 과장은 G3, 차장은 G4, 부장은 G5인 것 같다. 10년 차인 지금 나는 아직도 G1으로 되어있다. 입사 동기들은 이미 G3이다. 지금 내 연차에 이 직급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거대기업에 와서 지난 10년간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하고 있어서 직급에 대해서는 신경 안 쓴 지 오래되었다. 팀장과 임원은 팀원들의 등급 조회가 되어 모두 알 수 있다. 그래서 팀장이 종종 등급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급에 관한 이야기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잔소리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문희준 팀장, 그는 진심으로 나의 커리어까지 생각해 주는 팀장이었다.


"팀장님, 말씀해 주신 부분과 그동안 배려해 주신 부분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 10년차 사원인데, 11년 차 사원이면 또 어떻고, 계속 사원이면 또 어때요. 저는 직급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되었어요. 신경 써주시는데 이런 말씀드리게 되어 죄송스럽지만 회사에서는 의미 찾기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어요. 아니,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시간을 갖고 밖에서 한번 찾아보려고요.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항상 감사합니다."


팀장은 한 손으로 머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맨살에 가까운 속알머리를 만지며 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안경을 벗어서 책상에 올려두고 주먹으로 두 눈을 비비며 말했다.


"칠수야, 니 예전처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는 내 지난 이력을 모두 알고 있었다. 팀장은 두 눈을 비벼서 그런 건지 조금 울컥하고 있는 건지 양쪽 눈두덩이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괜찮아요. 저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인정받은 적이 없었어요. 지난 10년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지금이 제일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앞으로 회사 생활을 쉬지 않고 수행한다면 더 만족스러울 일들이 생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무한한 우주 속 회사에서 유한한 인생을 회사에서만 소진하기에는 아쉽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영원히 떠날 것도 아니고 일 년의 휴직 시간을 갖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돌아올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결심도 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저를 잘 이끌어주시고, 믿어주시고, 밀어주신 팀장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팀장은 다시는 나를 회유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말을 못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뭐라고 말하고 나를 잡고 싶어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어떤 문장도, 단어도 입술에서 나오지 못했다.




휴직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몇 년 전에 경험한 병가휴직보다도 더 단순했다. 제출해야 할 진단서도 없었고, 까다로운 서류 절차도 없었다. 이렇게 빨라도 되나 싶은 정도로 하루 만에 전자결재로 휴직 절차가 끝나버렸다. 이제 출근 날짜가 보름 남았다. 보름 뒤면 다시 또 휴직 인간이다. 마침 팀에는 새로 전배 온 선배가 있었고, TF장 업무와 담당하던 업무의 인수인계를 열흘간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 온 일들, 현재 벌어지는 일들, 다가올 일들을 모두 정리해서 인수인계 시간을 가졌다.



"철수님이 상당히 잘해줘서 이렇게 그냥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네요."


업무 인수를 받는 선배가 말했다. 이 선배는 생산부의 유리팀에서 온 유홍준 선배다. 순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의 과장급 선배다. 인상 또한 순하디 순한 양과 같은 인상이라서 유선배라는 호칭이 딱 맞는 사람이다. 생산부의 유리팀이라고 하면 많은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팀이다. 그 팀에서만 15년이나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선배를 싫어하는 사람 혹은 어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유선배는 제품 개발팀 사람들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는 마당발이다. 그야말로 제품 개발팀의 새로운 TF장으로 손색이 없다. 향후 TF장을 넘어서 참리더가 될 만한 사람이다. 게다가 유선배는 회사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항상 업무에 몰입하는 선배다. 언젠가 그 의미를 찾기를 응원하며 인수인계를 마무리했다.




보름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제 마지막 퇴근이다. 매일 주말처럼 보낼 것이다. 그동안 나는 주말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인지, 주말만 살았던 것인지 확인해 보려고 한다. 심장발작으로 급사한 노동자의 70% 이상이 월요일 아침에 죽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내게는 당분간 월요병이 없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일요일 밤 예능 프로그램 엔딩곡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삶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삶은 정말로 유한하다. 이제부터는 더욱 속도를 늦춰서 천천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더 빨리 일해봐야 일은 끝이 없다. 빠르게 새로운 일로 채워질 뿐이다. 더 빨리 움직일수록 시간의 노예가 될 뿐이다.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사원증에서 해방했다. 거대기업은 어느새 20세기에 조지오웰이 말하던 빅 브라더(Big brother)가 되어 21세기의 우리를 집요하게 감시하고 있다. 이 물건들은 자연스럽게 내 삶에 침투해서 일거수와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메신저, 메일, 결재 등 모든 작업이 모바일로 넘어가면서 사무실 안과 밖의 경계마저도 없어졌다. 따라서, 난 그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직을 하자마자 컴퓨터, 스마트폰의 소모적인 앱들을 정리하고 사원증을 내 낡은 서랍 속에 깊숙이 넣었다.


월급날에 다시는 월급이 입금되지 않았다. 월급이라는 마약은 나를 기업의 노예로 만들고 있었다. 모아둔 돈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걸어서 동네 도서관 투어를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각종 무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프로그램 대부분이 회사에 다닌다면 절대로 활동이 어려웠을 낮에 진행한다. 도서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새로운 사람들은 저마다 매력이 있었다. 무채색 회사에서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유채색 사람들이었다. 아침은 가볍게 샐러드를 먹었고, 점심은 도서관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저녁은 김밥이나 라면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생활하니 한 달에 식비로 28만 원 밖에 들어가지가 않았다. 그동안 먹고사는 데 과도한 소비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난 나도 모르게 소비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유튜브 쇼츠, 인스타 릴스, 페이스북, 틱톡부터 해서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웨이브, 쿠팡 플레이 같은 OTT의 이어 보기, 추천 보기와 각종 알고리즘은 나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고 소비만 하게 만들었다. 사회는 취미와 특기도 시간, 돈, 체력을 소비해야 얻게 되는 시대로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상당히 능동적이며 가성비가 좋은 취미이자 점점 특기의 영역에 가까웠다.


여가를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여가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여가를 위해 일하는 것인지, 일을 위해 여가가 있는 것인지도 정의하기 어렵다. 소비의 한도는 끝이 없다. 나도 모르게 소비의 노예가 되지 말자, 과소비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 여가를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알아차리며 즐겨야 한다. 유연근무 제도가 시행되었을 때, 제일 먼저 나서서 출퇴근을 나의 생활에 맞도록 이끌어간 경험처럼 시간을 마음대로 조율하려고 한다. 일과 여가를 조율하고, 결국 삶을 조율하는 조율자다. 진정한 워라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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