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오늘 하루 어땠어? 어떤 가치가 있었어?
바쁜 일상에 무슨 싱거운 소리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소금기 하나 없는 밋밋한 맛의 질문들이 매일 오고 간다. 자유학교는 깐깐하다. 어떤 활동을 하든 그냥 하는 법은 없다. 의미 없는 시간을 지양한다. 활동에서 가치를 찾는 것은 본질을 찾는 것이다. 학생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깐깐하게 길을 만들고, 걸어가는 시간을 교육과정으로 풀어낸다. 교사도 곧 학생이다. 모두가 학생인 학교에서 각자의 속도로 오늘 하루의 가치를 발견한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묻는다.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표현하게끔 놔둔다. 세련되지 않는 투박한 대답이 맛있게 들린다.
이번 주 첫 번째 아침열기 질문은 내 삶을 지배하는 듯한 가치는 무엇인가였다. 내가 뽑은 카드는 성실이었다. 한결같이 일관된 태도. 성실함은 아무것도 없던 내 인생에 하나씩 쌓이는 힘을 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체력이 달리는 요즘은 성실이 좀 무겁다. 한결같이 일관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은 현재의 나를 돌보지 않게 만든다. 힘들지만 표 내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참되게. 좋은 말이지만 너무 좋아서 지금 나에게는 겉도는 말이다. 내가 가치를 정한 것이 아니라 가치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질문은 나에게 다소 부족해서 보충하면 좋을 것 같은 가치를 찾는 것이었다. 나는 고귀함을 골랐다. 설명 중에 '고귀한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친절합니다. 자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와닿았다.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친절할 수 있을까. 살면서 상황이 급해 잠시 나를 내려놓는 시간이 많았다. 어릴 때는 나를 버린다는 느낌조차 구분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나를 버릴 때 느낌은 온다. 상황이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양보하라는 메시지는 익숙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고귀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에게 친절하다는 말.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상처를 더 이상 반복하지는 말자는 뜻으로 해석했다. 오늘 나는 나에게 친절했을까.
오후에는 자서전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다들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며 자서전을 썼다. 나도 자리에 앉아 생각한 글감을 정리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글이 자서전 밴드에 올라왔다. 학생들이 다 하는데 나도 어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느리긴 했지만 열심히 글을 적었다. 그런데 점점 속도가 더 느려졌다. 정신을 차리려는데 잘되지 않았다. 잠시 작업을 멈췄다. 그제야 느껴졌다. 나는 너무 피곤했다. 성실해야 하는데 손가락이 무거웠다.
순간 성실함과 친절함, 두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교사이니 해야 할 의무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습관적으로 들었다. 초콜릿 쿠키 하나를 먹었다. 달달함을 우적우적 삼켰다. 그래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피곤해서 반항심이 올라왔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 잠시 멈추자. 오늘은 날라리 교사로 마무리하자. 교무실 한편에 있는 소파에 가서 바로 잠을 잤다. 말 그대로 꿀잠이었다. 학생들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친절한 순간이었다.
하루닫기를 하면서 아침에 고른 가치를 하루 동안 얼마나 잘 찾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자서전을 쓰지 않고 땡땡이를 친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에게 고해성사 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다른 한쪽에는 나를 지켰다는 자랑스러움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그대로 말하고 나니 마음도 편했다. 오늘 내 글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의 글도 읽지 않을 것이다. 한결같고 일관된 태도로 행동하는 교사 이미지도 말아먹었다. 그래도 좋다. 내가 나에게 친절했던 하루라서 그런 것 같다. 마음속이 채워진 느낌이다. 피곤함이 다 가시진 않지만 채워진 마음 덕분에 기운이 난다. 가끔 일탈이 필요한 건가. 글을 쓰는 마음은 부끄럽지만 교사답지 않았던 하루는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