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정상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짜릿하다. 두고두고 해 온 말은 그 무게만큼 더 그렇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1년 동안 떨면서도 꿈꿨던 그날. 학교 뒷산을 매주 걸으며 산 정상에 한 번은 가자는 말을 하곤 했다. 걷기가 쉬울 때는 희망을 붙여 이야기를 했고 걷기 힘들었던 날에는 협박하듯 다짐하며 말했다. 낙엽이 산을 물들인 계절, 우리 마음에도 산에 대한 미운 정 고운 정이 스며들었다. 얕은 인연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수료하기 전에 산과 제대로 인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기온이 낮긴 했지만 크게 바람은 불지 않았다. 등산하기 좋은 날이었다. 각자 김밥과 초코바 그리고 물을 챙겨 학교를 나섰다.
3월부터 계속 걸었던 길이었다. 익숙한 길 위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가을의 쌀쌀함도 우리들이 내뿜는 입김으로 곧장 사그라들었다. 몸은 점점 여름의 온도로 돌아갔다. 입고 있던 웃옷도 하나씩 벗으며 열심히 걸었다. 매주 왔던 길은 평소보다 더 짧아진 듯했다. 처음 목적지에 도착해서 점심 먹을 준비를 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지만 입안에 김밥이 없어질 때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걷고 나서 먹는 김밥은 꿀맛 그 자체였다.
조금 앉아 있으니 금세 가을이 느껴졌다. 제법 쌀쌀했다. 걸을 때와 쉴 때의 체온 차이가 커서 한곳에 오래 쉬는 것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갔다 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는데 거기에 체온 유지를 추가시켰다. 움직임과 쉼의 조화가 중요할 듯했다. 무리해서까지 정상에 오르려 하지 말고 각자 몸 상태를 살펴서 할 수 있을 정도만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본격적으로 산을 탔다. 가파른 길 위에서 학생들의 숨소리를 라이브로 들었다. 그 속에 내 숨소리도 섞어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생음악이었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실없는 농담으로 낄낄거리면 초코바 한입 물어 삼킨 듯 힘이 생겼다. 산행은 분명 혼자 힘으로 해야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 누군가가 함께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참을 올라가니 계절을 착각한 진달래꽃이 피어 있었다. 주변에는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이 제법 많았는데 꽃은 홀로 봄인 듯했다. 우리는 신기해서 꽃을 관찰했다.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를 머리를 맞대고 찾았다. 우자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는 것이 진달래이고 꽃과 잎이 같이 나는 것이 철쭉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진달래꽃이 달린 가지에 나뭇잎이 하나도 없었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으니 먹어도 된다는 말에 한 학생이 냉큼 맛을 봤다. 맛있는 듯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지만 나는 먹지 않았다. 여러 번 속아 본 자의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우린 같이 웃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산의 날씨는 추웠다. 가만히 있으면 곧장 체온이 내려갔다. 힘들었지만 오래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두 시간 반 정도 걸려 정상에 도착했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함께 오기 위해 9개월 정도를 저 밑에서 걷고 또 걸었구나. 잠시 서서 정상을 만끽했다. 함께 있는 것이 고마웠다. 다시 열기가 가시고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우리들의 모습은 자유로웠다. 브이 손 하나 없이 멀뚱하게 찍었던 산행 사진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함께 고생하며 올라온 정상에서는 각자의 똘끼를 그대로 드러냈다. 함께 걸으며 편안해진 마음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착하지 않아."
"그래, 넌 착하지 않아. 그러니 착한 척하지 말고 그냥 화내 버려."
"그래, 착한 척 왜 해. 척하는 게 제일 손해야."
"맞아. 참지 말고 표현하고 살아."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가벼운 마음 사이로 토리가 속마음을 툭 털어냈다. 로쏘도 마음을 냈다. 평소에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학생들이었다. 무거운 고민을 가볍게 내뱉는 토리와 로쏘의 표정은 편안했다. 나도 가벼운 듯 가볍지 않게 웃으며 대꾸를 했다. 마음 따라 몸도 가벼워졌다. 함께 있어 든든한 시간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건 힘들 때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건 아닐까.
총 4시간 30분을 걸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덕분에 카페에서 먹는 토스트와 음료는 맛이 2배로 좋았다. 약간은 멍한 상태로 약간은 기분 좋게 하루닫기를 했다. 우리의 종아리 감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표정은 다들 밝았다. 내일이 되면 학생은 젊음을 무기로 생생하게 등교할 것이고 교사는 온통 몸에 파스를 붙이거나 병원을 가며 돌아오지 않는 회복 탄력성을 아쉬워할 것이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뭘까. 혹시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고 긴 거리를 짧게 만들어주는 비법은 아닐까. 학생들과 함께 걸으며 많이 웃었다. 편안했다. 억지로 말을 걸 필요도 없고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었다. 학생들의 말을 빌리자면 '척'할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집에 와 있는 지금도 귓가에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 쓰는 글에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 '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루가 기록되길 바란다. 다리가 쑤신다. 빨리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