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 : 지루한 맛

해야 할 것 & 하고 싶은 것

by 마나

달달한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기가 시작됐다. 한참 맛있게 먹던 사탕을 뺏긴 듯 입안이 텁텁한 교사 4명과 학생 6명은 몸에 밴 방학 냄새를 빼기 위해 남해에 있는 외딴 마을로 들어갔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지루함. 조용한 어촌 마을에서 폰을 다 끈 채로 3박 4일을 보내는 여행이었다.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입을 열고 씹을 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무맛의 새 학기를 달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루한 맛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삼시 세끼를 해 먹는 것 외엔 다른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일기예보에는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 딱 맞는 배경화면이었다.


여행을 가기 전 우리는 회의 시간마다 지루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각자가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지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을 해서 먹을 것인지 팀별로 나눠 메뉴와 날짜를 정하기도 했다. 교사들도 3끼를 맡아 잡채밥, 순두부찌개, 김치전, 볶음밥 등을 하기로 계획했다. 다들 고만고만한 요리 솜씨일 테니 무조건 맛있다고 말해주자는 말도 덧붙였다. 작년 여행에도 지루함을 콘셉트로 하긴 했지만 여행을 준비하며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카약을 태워주기도 하고 여행 동안 해야 할 과제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그때 여행 후 평가에서 재미있긴 했지만 콘셉트와는 맞지 않은 여행이었다는 피드백을 받았었다. 올해는 작년 여행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고 정말로 지루함을 맛보기로 했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교사들에게는 무계획을 계획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학생들이 만든 김밥과 어묵탕>

첫날 첫 끼니는 교사들이 만들었다. 비 오는 날엔 파전에 막걸리지만 학생들과는 반쯤 타협해서 물과 김치전으로 했다. 밥과 순두부찌개까지 만들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좁은 공간에서 불을 앞에 두고 4명이 함께 움직였다. 땀이 있는 대로 흘렀다. 시간이 지나며 화장도 다 지워지고 땀 냄새가 날 듯도 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다들 땀을 흘리고 있으니 이 땀이 뉘 땀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배가 고파 땀 냄새보다는 김치전 냄새에 코가 더 반응을 했기 때문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느꼈던 짭조름함은 분명 소금 맛일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저녁 먹기 전까지 각자의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이른 샤워를 했는데 땀범벅이 된 뒤에 하는 샤워라 꿀맛 같았다.


하루닫기에서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를 물었다. 산호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고민하며 보낸 하루였다고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산호의 고민이 반가웠다. 오늘의 고민 덕분에 내일은 좀 더 산호답게 보낼 거란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를 되돌아보았다. 나는 해야 할 일을 선택했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심리학 수업을 해야 해서 마음이 좀 급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학생들이 "딱히 상관없어요.", "아무거나 괜찮아요."라고 말할 때마다 신경 쓰였던 마음을 수업에 담았다. 한두 번이면 그 말도 존중해 줘야겠지만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 한 학기를 넘어간다면 한 번쯤 그것을 주제로 수업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책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를 같이 읽으며 무기력에 대해 함께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지루함 앞에 해야 할 일을 내세웠던 하루였다.


둘째 날의 지루함은 아침 식사를 하며 새롭게 흘러갔다. 24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정확히 갈 길을 잡지 못한 우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함께 뭔가를 하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일본어 공부를 하는 두나가 일본어를 배울 사람들을 모아 강좌를 개설했고 파파야는 요가 교실을 열었다. 나는 요가에 참여를 했다. 방학 내내 움츠려있었던 탓에 팔, 다리, 몸통을 갑자기 늘리려는 주인의 요청에 몸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요가를 하며 내 몸의 반응을 살폈다. 떠는 가운데 약간의 시원함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조금씩 더 쭉쭉 뻗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나의 몸과 비슷한지 연신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함께 하는 고통 속에 연대감을 느꼈다. 요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었다. 힘들었지만 지루함이 조금은 달달해진 듯했다. 하루를 끝내며 사람이 놀이를 찾는 것은 본능이 아닐까를 생각했다. 우리들의 모습이 7세 조카가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놀이를 찾는 것과 같아 보였다.


셋째 날에도 요가 수업에 참여했다. 좀 더 많은 인원이 방을 가득 채웠다. 서로의 낑낑거리는 소리가 아픔을 참게 해주었다.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하는 수업은 개인 운동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지루함을 함께 보내고 있는 동료였다. 요가가 끝난 후 각자가 가지고 온 책을 돌려보기도 했다. 나는 책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를 빌려 읽었다. 두 명의 작가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의 글이었는데 둘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재미가 쏠쏠했다. 책을 보며 혼자 키득거렸다. 해야 할 일로 책을 읽을 때는 의미를 찾고 하고 싶어 책을 읽을 때는 재미를 찾는 것 같다. 첫날의 독서는 교사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셋째 날의 독서는 사회적 역할을 떠나 그저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나의 지루함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 서서 골고루 빈 공간을 제공해 준 것 같다. 지루해서 침대에 누워 멍 때릴 때조차도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 어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싶었다.


여행이 끝이 나고 다시 주말이다. 다음 주를 생각해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조바심이 벌써 속에서 올라온다. 한 번의 여행만으로 내 마음에 여유가 자리 잡을 수는 없겠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지루함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학기가 진행될수록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것들이 모두 내게 어떤 형태로든 의미가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쉴 공간을 찾고, 무작정 열심히만 살려고 하지 않으며 내 몸이 주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살아야겠다 싶다. 여행은 늘 즐겁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소중한 것은 그 사이에 가끔씩 여행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