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법

히라가나를 외우며

by 마나

장마철이다. 금요일 오후는 보건 수업이 잡혀 있어 매주 1시간 30분 정도를 산행하고 한 주를 마무리했었는데 장마 때문에 1학기 남은 산행이 강제 종료되었다. 실내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지만 그래도 운동으로 머리를 맑게 한 후 일주일을 마무리하고 싶어 우리는 산행 대신 체육관에서 탁구를 치기로 했다. 나는 쥐뿔도 하나 없으면서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랑 칠 사람!'을 외치며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쳐다보았다. 5년간 탁구 친 실력으로 다 뭉개주겠다는 나름 근거 있는 자신감이 목소리와 눈빛에 들어 있었고 나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괜히 쭈뼛거렸다.


나는 두나에게 눈짓을 했다. 두나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내 앞에 섰다. 나는 한껏 여유 있게 내기를 권했다. 두나도 배짱이 있는 아이인지라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영단어 5개를, 두나는 일본어 히라가나를 벌칙으로 내세우며 경기를 시작했다. 첫 경기는 싱거웠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두나의 얼굴 앞에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서 영단어 5개 외우기를 잊지 않도록 했다. 순한 얼굴로 옆에서 구경하던 산호도 덩달아 끌려 나와 내 앞에 섰고 5분 후 나는 똑같은 눈빛으로 산호에게 영단어 5개를 안겨주었다. 꽤 만족스러운 탁구 수업이자 영어 수업이었다.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두나가 나를 불렀다.


한 번 더 치자고 했다. 자신감 가득 찬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3점을 달라는 말에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경기를 다시 시작했다. 첫 경기의 벌칙을 더해 영단어 10개로 늘리느냐 아니면 영단어 숙제가 없어지느냐를 벌칙으로 달아 놓았다. 나는 안전지대에 있었으므로 편안했다. 한 점씩 두나가 따고 내가 따라가는 형태로 경기가 진행됐다. 지고 있었지만 마음의 여유는 있었다. 왜? 나는 5년 짬밥이 있었고 앞서 이겼었으니까. 그런데 경기가 스멀스멀 흘러가더니 두나가 먼저 매치 포인트까지 도달하는 게 아닌가. 편안한 마음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점만 뺏기면 끝난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거슬림은 집중을 방해했다. 그리고 30초 뒤,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나도 두나도 당황하며 경기가 끝났다.


내가 준 영단어 숙제가 사라졌다. 두나는 승리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번 더를 외쳤다. 나도 영단어 숙제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 정신을 바짝 차렸으나 안타깝게도 한 번 흔들린 정신세계는 몸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제법 근거 있었던 자신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내 눈앞에 축 늘어졌다. 결국 나는 영단어 숙제를 주지도 못하고 되레 히라가나 숙제를 짊어지고 퇴근했다. 씁쓸한 패배자는 할 말이 없었다.


1도 관심 없는 일본어였다. 히라가나가 뭔지도 몰랐다. 탁구 내기에 눈이 멀고 5년 경력의 허풍에 스스로 속아 나는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본어에 도달했다. 두나는 내가 은근슬쩍 숙제를 하지 않을까 봐 하교 후에 친절하게 히라가나 표를 메시지로 전달했다. 이렇게까지 친절하지 않아도 되는데 싶었지만 멋있게 지고 싶어 허접한 마음을 애써 감추었다. 금요일 퇴근길이 일본어 글씨체만큼이나 꼬불거렸다.


<히라가나를 따라 써봤다>

집에 와서 표를 펴 보았다. 엄두가 나질 않았다. 꼼수를 써서 월요일 벌칙 검사 때 불쌍한 콘셉트로 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성의 표시로 조금이라도 외워가면 착한 두나가 봐주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첫 줄에 있는 'あ, い, う, え, お(아이우에오)'를 외웠다. 처음엔 영 감이 없었는데 글자가 꼬불거리는 대로 꾸역꾸역 한 줄을 외우고 나니 나도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한 줄 더 해 볼까. 그럼 두나가 나머지를 봐줄 가능성이 커질 테니 두 번째 줄까지만 애써 보자 싶었다. 밑에 있는 'か , き, く, け, こ(카키쿠케코)'를 살펴봤다. 한자 비슷한 것이 있어 나름의 연결을 지었다. 한자뿐 아니라 영어 발음기호와 비슷한 글자도 있었다. 일본어와 나 사이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넣어 둘을 연결시켰다. 훨씬 외우기가 좋았다. 두 줄을 외우고 나자 나는 월요일에 불쌍함 대신 자신감 있는 콘셉트를 가지고 출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머지도 외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탁구는 이미 졌지만 히라가나 앞에서는 당당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자씩 외우다 보니 일본어 'ね(네)', 'れ(레)', 'わ(와)' 글자가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들을 표에서 따로 떼어 비교하면서 외웠다. 또한, 내 별칭 '마나'를 일본어 'まな'로 적어 보았다. 뭔가 재미가 있었다. 어린 조카도 이렇게 한국어를 배우고 있겠구나. 나는 영어 교사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 지 너무 오래되어 배우는 과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연히 외우게 된 히라가나로 언어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설렘을 다시 느꼈다. 팔자에 없는 일본어 외우기라 시간 낭비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학생들이 내 수업 시간에 느끼고 있을 마음을 몸으로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맞는구나 싶어 혼자 웃었다.

<처음 써 본 일본어>

마침 이번 주 영어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영어 말하기 수행평가를 대비해 대본을 외우는 숙제를 내줬었다. 히라가나 숙제와 비슷했다. 아마도 두나는 영어 숙제의 부담을 내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본어 숙제는 영어 시간과 연결이 되어 꼭 해내고 싶은 숙제로 바뀌었다. 처음 시작할 때 꼼수로 한 줄만 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부담을 줄일 수 있어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 줬던 것 같기도 하다.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처음에는 대충 외웠고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재미있게 외웠다. 분명 규칙 없이 그저 꼬부랑거리는 선이었는데 의미를 넣고 계속 익히니 선이 글자가 되었다. 숙제를 끝내고 나니 두나가 너무 보고 싶다. 월요일에 숙제 검사를 끝내고 어깨에 힘 꽉 줄 나를 미리 상상한다. 뭔가 벌써 뿌듯하다.


학생들도 다음 주 영어 수업 시간에 내가 느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지난한 길을 각자의 방법으로 꽃도 심고 물도 주며 재미있게 건너와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너는 어떻게 건너왔는지 물으며 시시덕거릴 수 있으면 좋겠다. 고작 히라가나를 외웠을 뿐인데 내 마음은 이미 일본어를 마스터한 느낌이다. 길을 가다가 광고에 일본어가 적힌 것을 보았다. 한참을 보니 내가 외운 단어 'す(수)'자가 보였다. 참 반가웠다. 일본에 가면 이런 순간이 더 많아지겠지. 아이들도 이 느낌을 알게 해주고 싶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꼰대의 말이 될 것이므로 스스로 느낄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영어 교사인 내가 할 일이다. 학생들에게 우연인 듯 인연이 되는 영어와의 만남을 잘 주선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숙제를 끝낸 나는 괜히 시간을 체크한다. 아직 주말이 하루가 더 남았다. 지나가는 주말이 아깝지만 그것 못지않게 숙제 검사를 하는 날이 하루나 더 남은 것이 답답하기도 하다. 숙제를 끝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 생각한다. 편안한 주말보다 월요일이 더 기다려지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히라가나 좀 더 써보며 더욱 멋진 월요일을 기대해야겠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건 두렵고도 설레는 일이다. 크게 싫지만 않다면 나는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것들에 설렘을 좀 더 주고 싶다. 어떤 것이 내 인생에 들어올지 아무도 모르므로 일단 하고 본다. 실패도 많지만 그것보다 성취감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내 팔자에 이미 일본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허풍을 떨어본다. 오늘은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