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값 주세요
하고 싶은 말 중에 하기 쉬운 말이 있을까. 살다 보면 말은 하고 지냈지만 하지 못한 말이 더 많았던 날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퇴근 후 혼자 있는 집이 더 시끄러워진다. 낮 동안 조용했던 그 말이 그제야 메아리가 되어 내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텅 빈 소리를 조용히 들어본다. 나는 이렇게나 할 말이 많았었구나. 평소에 말수가 많지 않다 생각했던 나는 혼자서 하는 수다에 할 말을 더 잃는다. 어디 가서 말수가 적다고 하지 말아야겠다 싶다. 그리고 다음 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해 본다. 속에 있지만 나올 용기가 없는 말은 되도록이면 사라지도록 그냥 둔다. 용기 없는 말은 나오지 않을 때 더 의미 있을 거라고 판단해서다. 나는 보통 그렇게 나와의 대화를 끝낸다.
그런데 가끔은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용기는 없지만 해야 하는 말이라고 속에서만 날뛰는 비겁한 말들이 나를 괴롭힌다. 그중 하나가 돈 이야기다. 학년 초 학교에서는 함께 지내던 교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새로운 곳에서 잘 지내시라는 마음을 담아 떡을 해서 보낸다. 총무였던 나는 남은 교사들과 의논 후 떡을 보내드렸다. 이전에 모았던 돈은 이미 정리한 후였기 때문에 일단 내 돈으로 먼저 떡값을 계산하고 다시 공금이 모이면 돌려받기로 했다. 그렇게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은 교사들에게 너무 바쁜 시기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떡을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어갔다.
올해 나는 총무가 아니다. 5년 동안 했으면 많이 했다며 돈에서 손을 털겠다고 반 장난으로 으름장을 놓았었다. 그리고 드디어 돈에서 해방이 되었다. 권력(?)을 놓고 자유로워진 나는 내게 남은 숙제의 존재를 기억하기 전까진 해맑게 지냈다. 어느 날 이웃해 있는 학교에서 함께 나눠 먹자며 떡을 올려 보내주셨다. 순간 배고팠던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떡을 뜯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쫀득쫀득한 것을 잘 쪼개어 위장으로 내보내자 그제야 허기가 조금 가셨다. 아직 떡이 남았다며 손에 든 떡을 보며 싱글거리던 찰나 문득 잊고 있던 떡값이 떠올랐다. 갑자기 목이 막혔다. 입맛이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 교사들은 해맑게 떡을 드시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아무도 나의 떡값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해야 했다.
그때가 4월 말이었으니 그때부터 나는 매일 밤마다 떡값에 대해 나와 토의를 하기 시작했다. 돈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듯하니 그냥 포기하자는 말과 적은 돈도 아닌데 말 못 해 받지 못하는 건 돈을 떠나 바보 같은 짓이라는 말이 대립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학교에서 지냈다. 가끔 떡을 얻어먹을 때가 있었지만 나는 마냥 해맑지 못했다. 똑 부러지지 못하는 내 모습이 성가셨다. 그래도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학교에는 늘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기에 이미 한참 지난 돈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학기가 흘러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겉으로 볼 때 나도 해맑았다.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2학기가 시작되었다. 교무회의를 할 때마다 오늘은 말해야지를 다짐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 일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돈 이야기라 내 속에 돈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같아 멋쩍었다. 돈 앞에서 좀 더 쿨할 순 없을까. 마지막으로 합리화를 시켜보았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예뻐 보이고 싶은 욕심일 뿐 착한 것도 순진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전 교무회의를 하며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떡값을 이야기하자 동료 교사들이 왜 진작에 얘기하지 않았냐며 무안하지 않게 내 말을 받아주셨다. 말을 하고 나니 이게 몇 개월 동안이나 끙끙거리며 고민할 정도의 이야기였나 싶었다. 묵혀둔 숙제 잘 해결했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며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듯해 뿌듯했다.
그날 밤부터 떡값에 대한 토론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떡을 보며 나는 다시 해맑아질 수 있었다. 떡을 떡으로만 볼 수 있고 말을 말로만 볼 수 있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또 다른 '떡값'이 나의 저녁 토론 주제로 올라올 것이다. 그때 내가 내뱉어야 할 말과 넘어가야 할 말을 조금은 더 잘 선택하길 바라본다. 나는 삶을 해맑게 살고 싶지만 기억하지 못해 혹은 말하지 못해 그렇게 지내고 싶진 않다. 바보 같지 않은 바보가 될 수 있을까. 나의 해맑음이 텅 비지 않도록 오늘 밤도 열심히 나와 토론해 봐야겠다.
대문 그림 : 네이버 이미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