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와 나
필사를 하기 전 매일 공책 윗부분에 날짜를 적는다.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이 작은 행위 하나가 시간에 대한 내 감각을 예민하게 살려놓는다. 어제 적었던 날짜를 보고 있으면 하루의 속도가 마치 공책 한 장을 넘기는 정도인 것만 같다. 쏜살같은 하루를 붙잡고 싶어 일부러 손을 뭉그적거린다. 느린 필사가 조급한 나에게 편안하게 말을 거는 듯하다. 오늘 끝낸 필사는 내일 적힐 부분 아래에 놓인다. 쌓이는 날짜만큼 내 안에 책이 들어온다. 시간이 마냥 흘러가는 건 아닌 것 같아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나를 설명하기 가장 좋은 표현은 '차곡차곡'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씩 꾸역꾸역해나간다. 구수한 곡차가 한방에 만들어질 리는 없지 않은가. 차를 끓이며 재료에서 맛이 완전히 우러날 때까지 기다린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안에는 어려운 일을 한 방에 해결하는 그런 멋짐 따윈 없다. 성격이 우직해서도 아니다. 그 길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불안함을 잘 느끼는 터라 좀 불편하더라도 기본이 제일 안전한 길이라 믿는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찬다. 차 맛을 음미하기 제일 좋은 시간이다.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겨 본다. 구수한 맛이 온몸에 스며든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그래, 바로 이때다.
웬만하면 때를 놓치지 않고 살고 싶다. 현재 내가 이 모습으로 사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리석음으로 그것을 찾지 못하고 놓칠까 봐 겁이 난다. 삶이 무의미하게 흘러갈까 봐 두렵다. 잘살고 싶은 욕심과 못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내 '차곡차곡'의 원동력이다. 나는 비행기 창 쪽 좌석을 좋아한다.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레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곳이라고 허풍을 떨며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본다. 조금씩 더 용감해지면 나의 '차곡차곡'도 몸에 힘을 좀 뺄 수 있을 것이다. 한창 일할 대낮에 제일 햇볕 잘 들어오는 곳에서 대자로 뻗어 늘어지게 자는 용감한 고양이처럼 나도 마음만은 그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시간이 올 때까지만 차곡거려며 기다려볼까.
출근 전 하는 필사는 자고로 깜깜한 새벽에 하는 것이 최고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시간에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점점 해 뜨는 시간도 늦어져 덩달아 나도 조금씩 느려진다. 급한 것 없는 새벽에 홀로 앉아 책과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읽은 <동물농장>에서는 처음 만들었던 규율들을 조금씩 어기며 초심을 잃어가는 돼지들의 모습이 보였다. 교묘하게 몇 글자만 바꿔놓고 다른 동물들을 속이는 꼴이 처음 보는 장면 같진 않아 씁쓸했다. 쌉쌀한 새벽 공기가 동물들의 삶을 더 잘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내가 좀 더 열심히 일하면 돼'를 외치는 복서의 순진한 결심이 내 입을 더 텁텁하게 했다.
필사를 끝내고 창가를 보니 다행히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오늘 있을 일을 먼저 보여주면 재미없으니 본방송 시간을 사수하라는 듯 하늘은 새는 빛 하나 없이 촘촘하게 검은색으로 덮여 있었다. 호기심 가득 안고 창밖을 쳐다봤다. 나이를 제법 먹은 것 같은데 아직 새벽하늘에 설레는 나를 보니 철은 좀 덜 먹은 듯했다. 필사 공책이 더 채워지면 나도 좀 무거워지려나.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에 괜히 어깨를 으쓱거려 본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이 무거워지는 길인지 가벼워지는 길인지 두고 볼 일이다.
벌써 가을이다. 지금 내 가을은 잘 우러나고 있을까. 아무래도 봄과 여름이 만들어낸 재료의 의미만큼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더 쌀쌀해지면 깊은 맛을 기대하며 새벽에 조용하게 차를 끓여봐야겠다. 목으로 넘어가는 곡차가 갓 일어나 아직은 굳어 있을 내 몸을 잘 녹여줄 것이다. 계절이 변해도 하늘은 그대로다. 나도 하늘 따라 하던 대로 사각거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