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동물농장>을 끝내며

by 마나

겨울은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올해 했던 일들을 하나씩 마무리할 때마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시작은 잘하나 마무리를 못했던 나였는데 나이를 먹어가며 하나씩 끝을 맺는 순간이 늘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면 그 속에 살고 있는 나도 시작하고 끝맺으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게다. 요즘 나는 계절에 맞게, 나이에 맞게 잘 살아간다고 느낀다. 특히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겨울에 맞게 차분한 웃음이 났다.

조지 오웰의 책 <동물농장> 필사를 오늘 아침에 끝냈다. 2023년 9월 9일 처음 시작해서 12월 9일에 끝을 냈으니 석 달이 걸린 셈이다. 소설은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란 문장으로 끝난다. 나는 이 문장이 조지 오웰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이 주인인 농장에서 인간은 제일 경계해야 할 무리였다. 하지만 민중이 나라의 제대로 된 주인이 되지 못하면 허술한 틈 사이로 누군가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게 된다. 돼지 나폴레옹은 권력을 차지했지만 좋은 주인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동물들에게는 가장 큰 적인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어졌다. 술에 취한 나폴레옹을 구경하는 여러 동물들을 보며 나는 이 상황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독재자 밑에서 민중은 힘들어 보이긴 했으나 피해자보다는 동조자 같았다.


끝까지 일만 하다 병들어 도살장에 끌려갔던 말 복서를 생각했다. 죽기 전 복서는 무슨 감정이 들었을까. '나폴레옹은 무조건 옳다'는 말을 되뇌며 살았던 복서를 그저 불쌍하다고만 볼 수 없다. 연민이 생기긴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그 선택은 복서가 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농장> 필사를 끝내며 앞으로 더 배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잘 알지 못해 나쁜 일에 동조하게 되거나 나도 모르게 내 자리를 버리게 되는 상황을 줄이기 위해서다. 몰랐다는 말은 문제를 피해 갈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알지 못해 하게 되는 잘못된 선택들도 모두 나의 선택이란 뜻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기 위해 그만큼 고민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복서가 좋다. 자신이 가진 엄청난 힘을 선한 의도로 사용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복서처럼 열심히 살되 인생의 방향키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욕심 많은 나는 좋은 것 다 갖다 붙여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잡아본다. 그리고 매일 하는 필사를 돌 하나하나를 옮겨 풍차를 만들던 복서의 마음에 갖다 붙여 본다. 복서는 언제 완성될지 모를 풍차를 위해 일상을 꽉 채워 보냈다.그리고 조금씩 완성되는 풍차를 보고 또 봤을 것이다. 나도 나의 필사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하루를 필사로 시작한다. 조금씩 채워지는 필사 공책을 보고 또 보며 내 시간도 잘 쌓이고 있는 중이라 믿는다. 필사는 누가 시켜 한 것이 아니니 나폴레옹의 횡포가 나에게까지 미치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 언젠가 필사로 내게 힘이 생긴다면 더도 덜도 말고 복서처럼만 선한 의도로 쓸 수 있길 바란다.

<동물농장>을 원서로 읽은 이유 중 하나는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영어 교사인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내 교실에서 공부를 제일 하지 않는 사람은 나였다. 공부하지 않는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속 빈 잔소리다. 속을 좀 채우기 위해 시작한 이번 필사는 내 영어 공부에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다음 필사 책도 영어 원서를 하고 싶다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 초등학교 교사인 Rafe Esquith가 쓴 'Lighting Their Fires'를 골랐다. Rafe는 교사들 모임을 통해 두 번 만난 적이 있다. 사람 좋은 Rafe의 삶을 조금은 알고 있어 몇 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마음이 더 갔었다. 아무래도 필사는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 번 선택한 책은 몇 달 동안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다시 꺼낸 Rafe의 책은 여전히 푸근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잘 지내보자고 책을 보며 말했다.


<동물농장>과 <Lighting Their Fires>을 책상에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손으로 한 번씩 만져보았다. 내 손때가 가득한 <동물농장>과 이제 점점 더러워질 Rafe의 책 둘 다 나와 인연이 깊은 책이다. 작가는 생각이나 삶을 농축시켜 하나의 책에 넣고 나는 그 책을 꾹꾹 눌러 내 공책에 필사한다. 작가와의 만남을 매일 하며 살아가는 택이다. 추운 겨울 아침에 몸과 마음을 녹이기에 딱 좋은 만남이다. 내 삶에 놀러 오신 손님들을 위해 주인으로서 차 한 잔 대접해야겠다. 오늘 나의 마무리와 시작을 응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인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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