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날씨였다. 구름이 적절하게 끼어 있어 햇살도 성가시지 않았다. 다소 춥긴 했지만 이것도 부지런히 걷다 보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었다. 우리는 야심 차게 순례길에 올랐다. 꼴랑 하루, 그것도 잠시 걷는 일정을 짜놓고도 대단한 시간을 보낼 것처럼 신발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그냥 길이 아니라 순례길이었다. 걷다 보면 깨닫는 게 있을까. 이 길 위에 무엇이 있길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걸으며 수행을 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수행자의 깊이를 알 리 없는 우리는 실상 시답잖은 농담에 좀 더 집중하며 길을 걸었다.
길은 예상한 것보다 더 길었다. 이치노미야지 사찰까지 가려면 작은 산 하나를 넘어야 했다. 관광지 주변과는 달리 일본인들의 실제 주거지를 보는 맛이 솔솔 했다. 수수하고 소박한 곳이었다. 쓰레기 하나 없는 길 위에서는 건물의 녹슨 부분도 품격이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깨끗하게 정돈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내 흔적이 되도록이면 적게 남도록 조심해서 걸었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수행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3시간쯤 지나 이치노미야지 사찰에 도착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찰 내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국의 절이 자연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면 일본 사찰은 자연을 잘 다듬어 놓은 모습이었다. 나무 하나, 돌 하나도 모두 각을 맞춰 정돈한 것일까. 조경이 잘 되어 있는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 오면서 봤던 집들이 다시 떠올랐다. 거의 모든 집에 갓 미용실에서 다듬은 까까머리와 같은 나무들이 있었다. 나무를 조경하는 게 그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기회가 된다면 일본인들에게 있어 깨끗함과 정돈은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사찰을 다 돌아보고 나니 구름이 많아져 하늘은 어두침침했다. 아직 오후 3시도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마치 해가 지는 시간 같았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출구로 나와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이곳에는 택시가 없습니다. 위치를 이동해서 다시 신청하세요." 같은 메시지가 반복해서 떴다. 다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성취감 덕분에 좀 더 힘을 내보려 노력했다. 앱이 원하는 장소인 시내 쪽으로 더 나갔다. 길 끝에 주유소 하나가 보였다. 오아시스를 만난 듯 서둘러 그곳으로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곳에는 택시가 없어요. 좀 더 이동하셔서 찾아보셔야 할 거예요." 택시 앱과 똑같은 말을 들었다. 어쩌면 숙소까지 다시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큰둥한 점원에게 다시 번역기를 붙잡고 어설프게 대화 신청을 할 수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버스도 없는 곳이었다. 대중교통이 하나도 없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길고 긴 길 앞에서 믿을 만한 것은 후들거리는 두 다리뿐이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어 일단 서둘러 걸어 보기로 했다. 고생해서 걸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순례길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했다. 꽉 찬 구름마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빗방울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걷기 좋은 날은 아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한참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경찰차가 보였다. 순간 피곤함이 가시며 몸에서 힘이 불끈 솟았다. 슬프지만 '진정한 순례길'을 걷는 지금의 선택은 내 의지가 아니라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차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부끄러움 따윈 없이 주차장에서 나오려는 경찰차를 붙잡고 창문을 두드렸다. 어리둥절한 경찰 두 분이 우리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도와주세요. 길을 잃었어요. 한국 사람이에요." 일본어를 못하는 우리는 영어로 말을 했고 영어를 못하는 경찰은 눈빛으로 당황스러움을 말했다. 다행히 우리의 표정으로 상황은 이해하신 듯했다. 그 뒤로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비가 조금씩 오는 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있어 주는 경찰이 있어 마음속 불안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경찰차는 일반인을 태울 수 없습니다. 택시를 탈 돈이 있습니까?" 없는 돈도 만들어 줄 판이었다. 전화로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택시가 15분 뒤에 도착한다고 했다.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일을 해결하느라 정신없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불현듯 잘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의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순간 정적을 메우고자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어색해서 더 좋았던 웃음이었다.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한 후 헤어지려는데 경찰이 다시 번역기에 입을 대로 이야기를 했다. "15분 동안 경찰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마지막까지 친절한 경찰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잘 정돈된 사찰과 길 위의 집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터가 깨끗한 것은 친절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15분이 안 되어 택시가 왔다. 반갑고 또 반가워서 고맙단 말이 계속 나왔다. 갈 때는 3시간이 걸렸는데 올 때는 16분 만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어오니 안도감과 허탈감이 동시에 들었다. 무사히 돌아왔긴 했지만 어려운 길을 쉽게 왔기 때문이었다. 주유소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그새 잊어버렸나. 더 고생하지 않고 돌아온 길을 아쉬움으로 느끼는 나를 보며 내 모순된 모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걸었던 길은 진짜 순례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순례자의 흉내만 내다가 혼쭐이 난 나는 누가 내 못난 모습을 볼까 부끄러워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시코쿠 순례길을 걸었지만 나에겐 그냥 길이었다. 나는 진정한 순례길을 만날 수 있을까? 깨끗한 길을 흔적 없이 걸으며 다리의 후들거림에 박자를 맞춰 더 걸어갈 수 있을까.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에 아쉬움이 남는 건 수행을 해 보고 싶다는 뜻이고 택시 기사와 경찰에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 건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걸으며 내 안의 모순과 마주했다. 수행이란 혹시 속에 든 모순들을 하나씩 푸는 과정이 아닐까. 순례길 대신 수행에 대한 호기심과 일본인들에게 진 빚을 고이 안고 간다. 언젠가 내 깊이가 좀 더 깊어지면 내 한계 너머로 갈 채비를 할 것이다. 그땐 깨끗하고 소박하게 정돈된 길이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
대문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