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한달살이 : 에필로그
엄마 눈에는 걱정이 한 움큼이었어. 나는 당신이 아끼시던 슬리퍼를 신고 현관에 서 있었지. 신어보니 그 신발만큼 편한 게 없더라며 신겨주신 거였어. 나는 그 진득한 눈빛을 거두고 싶었어. 그래서 한 손에는 시원한 얼음물이 든 엄마 텀블러를, 다른 손에는 엄마가 싸준 간식거리를 들고 괜히 무겁다고 툴툴거렸지. 가는 길에 먹을 정도로만 쌌다고 하셨지만 언뜻 봐도 이틀은 먹을 분량이었어. 집 나가는 거라고 말하기엔 무색할 정도로 내 몸에 엄마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어. 내가 엄마인지 엄마가 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지.
아빤 떠돌아다니는 내가 다 이해가 되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 그래도 이왕 집 나가는 거 하고 싶은 거 실컷 하며 살라고 하시더라. 아빠의 말씀에 웃음이 났어. 이해가 될 듯도 했거든. 나도 밖에서 살고는 있지만 뚜렷한 목표와 방법을 계획한 후 사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끔씩 왜 이렇게 사냐고 스스로 물어보며 살고 있어서 아빠의 어리둥절함이 낯설진 않더라고. 나는 앞뒤 다 떼고 하고 싶은 거 실컷 해라는 말씀만 마음속에 넣었어. 그리고 현관문을 닫았지. 부모의 말 중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망나니 같은 딸이 집을 나서는 중이었어.
손끝에서 발끝까지 엄마 냄새가 폴폴 났어. 속에 역마살 가득 찬 나는 집 떠나 홀가분하면서도 온몸에서 느껴지는 엄마 때문에 계속 눈물이 났지. 조수석에 둔 간식 가방에 자꾸 눈길이 갔어. 저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엄마는 가는 중에 심심하거나 잠이 오면 먹으라고 하셨지만 생전 처음으로 하는 장거리 운전이라 물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어. 식탐 때문에 쳐다보는 게 아니었어. 내 몸에서 나는 엄마 냄새가 가방에서도 났기 때문이었지.
'아, 짜증 나!'
가뿐하지가 않고 진득한 무언가가 발바닥에 붙어 있는 것 같았어. 혼자서 훌쩍거리다 발이 무거워 화까지 나더라고. 지난 한 달 동안 집에서 내가 했던 못된 짓만 생각이 났어. 아무리 없애려 해도 한 번 나온 영상은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됐지. '분명 잘하려고 애를 쓰긴 쓴 것 같은데 말이야.' 억울한 마음에 변명도 해 보았지만 크게 소용이 없었어. 한참 동안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제각각 움직였던 것 같아. 덕분에 잠이 오진 않아 긴 시간 운전엔 도움이 됐지. 부모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식을 도와주는구나 싶었어.
열심히 집 반대쪽으로 운전을 했어. 지도상으로는 4시간 40분이 걸린다고 했지만 나는 총 6시간을 운전해서 새로 잡은 숙소에 도착했지. 오늘 하루 운전한 거리가 336킬로였어. 무사히 왔다는 사실만으로 꽤 성취감도 들더라. 숙소에 오자마자 간식 가방을 열었어. 예상대로 내일까지는 배부르게 먹을 간식이 들어 있었지. 이렇게 멀리 떨어졌는데도 엄마 냄새는 계속 나는구나. 울어도 화를 내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리움이 코끝에서 맴돌고 있었어. 엄마의 고집을 보는 듯하더라고. 하긴, 울 엄마 고집을 누가 꺾어. 나는 항복했다는 의미로 혼자서 웃었어.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 아빠 말씀대로 이왕 이리된 거 엄마의 향을 더 느껴보기로 했어. 나는 그릇에 옮겨 담느라 엄마가 수박 조각에 낸 포크 자국 그대로 포크를 꽂았어. 엄마가 이 방향으로 수박을 집었었구나. 달달한 수박을 먹으며 당신도 기억 못 할 찰나의 시간을 따라갔지. 처음 온 숙소에서 짐 정리도 안 하고 수박부터 먹고 있는 중이었어. 무거워 안 가져가겠다고 했던 바로 그 가방을 뒤져서 말이야. 만약 엄마가 내 모습을 직접 봤다면 또 뒷북칠 줄 알았다며 제대로 타박을 줬겠지? 그래도 수박 그릇은 안 뺐었을 거야. 그래, 그랬을 거야.
가족과의 한달살이도 무사히 끝났어. 나는 다시 혼자야. 북적거린 시간에 대한 만족감과 진득한 그리움이 동시에 느껴져. 첫날은 끝날이기도 하니까 그럴 거야. 가족과 운전은 다른 건가 봐. 끝에 남겨진 게 다른 걸 보면 말이야. 이 마음 또한 곧 정리가 되겠지. 이젠 안전하게 살길 바라는 엄마의 걱정 대신 새로운 곳에서 도전하며 살고 싶은 내 호기심을 따라갈 차례야. 말 안 듣고 반대로 산다고 너무 미워하진 마. 신나게 살다 다시 돌아갈 테니. 우선 오늘은 집 나온 것만으로 됐어. 딸도 하루 잘 보냈으니 엄마도 그만 자. 꼭 잘 자.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