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붓다선원 : 거리두기
“한가해, 산책하러 가자.”
한가해는 산책이란 말에 벌떡 일어났어. 길쭉한 다리가 꼬리의 장단에 맞춰 갑자기 바빠졌지. 보살님이 나무에 묶인 줄을 푸니 한가해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자신이 안다는 듯 능숙하게 먼저 길을 나섰어. 산길에는 낙엽이 흩뿌려져 있었지. 아침저녁으로는 겨울의 추위가 느껴지긴 하지만 낮은 아직 따뜻해 점심 공양 후 걷기 좋았어. 오전을 바쁘게 보낸 후 느끼는 한가한 산책은 일상의 작은 선물처럼 느껴지더라.
한가해는 종무소에 계시는 법화 님의 개야. 붙임성도 좋고 말도 잘 알아들어서 절에서 인기 만점이지. 아무리 밝은 낮이라 하더라도 산길을 혼자 산책하는 건 살짝 부담이 있어서 절에 사는 보살님들은 한가해와 함께 산책을 많이 하셔. 다행히 꼭 주인이 아니라도 한가해는 길을 잘 나섰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더라고. 산책을 시작하면 목줄도 필요가 없었어. 우리가 가는 속도에 맞춰 가다가 서서 기다리는 한가해였으니까.
평온한 절에 사는 개에게 잘 맞는 이름 같았어. 덕분에 우리 산책도 편안했지. 우리 말을 알아듣는 건지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보조를 맞춰 걷다가 어느새 멀리 가서 혼자만의 놀이에 빠지곤 했어. 그래도 일정 정도 이상의 거리는 넘어가지 않더라고. 참 영리하다 싶었어. ‘인간과의 관계 참 쉽죠?’ 옆 사람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스스로 즐길 줄 아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는 것 같았어. 현장 실습을 가미한 한가해의 인간관계 수업은 마음에 와닿을 수밖에 없더라.
같이 산책한 보살님 말로는 며칠 전 산책 중에 다른 개가 한가해를 보며 짖는 순간이 있었대. 그때 법화님이 “한가해, 묵언해야지.”라고 하자 갑자기 긴장하던 몸을 풀면서 다시 조용히 걷더라는 거야.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비유만은 아닌가 보다 싶더라고. 한가해를 보면 볼수록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짧은 순간에 긴장감을 푸는 건 사람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야. 나도 절에서 삼 개월 동안 있을 테니 풍월의 첫 자락 정도는 읊으며 떠날 수 있겠지?
다음 날은 춥고 비가 왔어.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꽤 쌀쌀하더라고. 전날 했던 산책도 생각나고 한가해는 안전하게 있나 걱정도 되어 찾아가 봤지. 개는 코끝에 콧물을 매단 채 입김을 불면서 벌벌 떨고 있었어. 추워하는 것 같아 뭐라도 덮어주려고 가까이 다가갔는데, 순간 녀석이 내 쪽을 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거야. 내 얼굴을 그새 잊어버린 건가? 어제와 너무 반응이 달라 무섭고 놀라고 서운한 마음이 뒤엉켜 도망치듯 바로 뒤돌아섰어. 한참 가슴이 두근거렸지.
추위도 잊은 채 한 곳에 서서 마음을 진정시켰어. 그리고 다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 멀리 있는 그를 봤지. 떨어진 거리에 안정감을 느껴서 그런가 그제서야 멋쩍은 웃음이 나오더라. 개한테 서운함을 느낀 게 민망했거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오롯이 추위를 몸으로 견뎌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라도 낯선 이가 싫지 않았을까. 어제 배운 적절한 거리를 그새 잊어버리고 앞뒤 생각 없이 혼자 덥썩 달려들었다가 시무룩해진 내 모습을 보니 가야 할 마음 수양 길이 까마득하다 싶더라. 추위 속에 한가해를 홀로 두고 숙소에 들어가는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내게 허락한 적정 거리를 잊지 말자 싶었어.
슴슴한 절밥 더 열심히 먹으면 널뛰는 내 마음도 어느 정도 평온해지겠지. 그럼 그를 대하는 내 마음도 지금과는 다를 거야. 그땐 나를 향해 꼬리 흔드는 한가해와 함께 한가하게 다시 산책하고 싶네. 타고난 거리 감각이 없는 나는 시간을 들여 경험으로 적절한 선을 배워야 해. 함께 산책하면서도 혼자만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을 거리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오늘도 다가갔다가 물러나는 굴욕을 감사해하며 살아보자고. 그때까지 한가해, 기다려. 같이 산책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