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먼 사람 붙잡고 화풀이

건강보험료

by 마나

살면서 한 번도 건강보험료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세전 월급에서 무더기로 빠져나가는 돈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월급날이 되면 이유는 궁금해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세전과 세후 금액 차이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경제에 무지했던 나는 부끄럽게도 퇴직하고 나서야 내가 가진 돈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건강보험료는 제일 먼저 맞닥뜨린 차가운 세상이었다. 휴직 1년을 하고 퇴직을 결정했는데 나가기 전, 지난 1년 동안 내지 않았던 건강보험료를 한꺼번에 내라 했다. 12개월 치 돈의 존재감은 제법 컸다. 생각지도 못한 목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난해 내가 병원에 갔던 건 기억도 안 나고 억울하기만 했다.


잘못 없는 행정실 직원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왜 내가 그 돈을 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달라고 했고 당연히 직원은 내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이어진 세세한 꼬리 질문에 그는 좀 더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고 말하고 끊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마음과는 별개로 속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는 나는 건강보험료에 대해 알고나 있나?'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건강보험료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답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나도 모르고 한 질문에 상대가 답을 못한다고 나무라며 공부해서 다시 알려달라고 하는 게 맞나 싶었다. 이런 걸 보고 흔히 진상이라 말하는 거겠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때 내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행정실 직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했다. 어떻게 해서 내가 내야 할 돈이 나왔는지 1원까지 다 챙겨서 말해주었다. 나는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괜한 사람을 붙잡고 억울함을 풀고자 했다는 걸 깨달았다. 열심히 찾아준 게 미안해서라도 바로 돈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진상으로 찍혔겠지만, 더는 행동을 추가하진 말지 싶었다. 대화가 끝나고 직원은 딱딱한 말투로 내게 더 궁금한 게 있는지 물었다. 미안했지만 그땐 부드러운 말투가 더 이상할 것 같아 나도 비슷한 톤으로 답했다. 나는 진상으로 정체성을 굳히며 대화를 마무리했고 더는 억울해하지 않고 1년 치 건강보험료를 납부했다.


통장은 순식간에 헐렁해졌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여윳돈 없이 생활비를 마련해 둔 상태라 당황스러웠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는 일과 인간관계가 힘들어 울었는데 퇴직을 하니 돈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아직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도 전에 해야 할 것이 하나씩 내게 다가왔다. 내가 뭘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사회에 소속되어 있어서 지워지는 무게 같아 아까와는 또 다른 억울함이 몰려왔다. '참, 억울할 것도 많다.' 나는 혼자서 피식 웃으며 구시렁거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텅 빈 잔액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고민했다.


새 세상에선 나는 모르는 게 많았다. 거꾸로 말하면 알면 채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건강보험료에 관해 공부를 시작했다. 퇴직 후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신분이 바뀐 나는 적은 돈으로 병원에 다닐 수 있었던 원리를 그제야 인지했다. 직장가입자는 매달 월급에 6.99%를 건강보험료로 낸다. 그중 절반은 직장이 부담해 개인은 절반만 책임진다. 하지만 지역가입자에게는 소득, 재산, 자동차 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 책정된 세금이 부과된다. 직장이 없으니 보험료 절반을 내줄 대상도 없다. 직장인의 월급은 정해져 있어서 내야 할 세금도 선명한데 그 외 사람들 소득은 숨기기 쉬워서 탈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직이 됐는데 보험료를 더 낼 수도 있다는 말은 월급 없는 처지에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보험료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상황이 이해는 됐다. 그래도 텅 빈 내 통장 잔액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퇴직이었는데 시작하자마자 나는 돈돈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야 할 보험금을 정확히 알기 위해 떨면서 건강보험공단으로 향했다. 임의계속가입 제도가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었다. 퇴직 후 안정될 때까지 3년 정도는 직장 다니는 동안 내던 만큼만 돈을 낼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였는데 낼 보험료가 많으면 활용하면 되겠다 싶었다. 상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재산을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나라에 내는 돈이 무섭게 다가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진 건 모두 포함된다 하니 내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나는 상담원에게 임의계속가입 제도를 신청할 자격이 되는지부터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건강보험료 폭탄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담원은 내료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자격은 되는데 왜 신청하고 싶은지 되물었다. 건강보험료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심각하게 말하는 내게 그는 싱긋이 웃으며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가진 게 많지 않아서 지역가입자로 있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나는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혹시 내 재산을 다 보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하나씩 나열하며 물어봤다. 끝까지 그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순간 모든 걸 보여준 것 같아 민망했지만 그 변화 없는 표정은 붙잡을 것 없는 퇴직자에겐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공단을 나오는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내가 가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기쁜 일이었나. 실실거리는 내 모습이 어이없어 정처 없이 그냥 걸었다. 챙겨야 할 게 많지 않아 홀가분했다. 단순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딱 지금처럼만 살면 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둔 것과는 별개로 삶은 계속된다. 홀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나를 보호하던 테두리가 직장에서 사회로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느슨해진 삶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돈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내가 안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지출이라는 것 먼저 받아들이자 싶었다.


앞으로도 공부 많이 해야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불안의 이유인 것 같아서다. 더는 몰라서 쓸데없는 억울함을 느끼며 살고 싶진 않다. 그럼 애먼 사람 붙잡고 화풀이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직책이 있다면 그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허허벌판에 서 있다. 퇴직은 단순히 직장을 그만둔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하루 8시간씩 보냈던 곳을 떠나 새로운 일상에 도전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오늘처럼 하나씩 배워 가자고 다짐해 본다. 가다 보면 나를 보호해 주는 사회 속에서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자유의 참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대문사진 : 픽사베이

수요일 연재
이전 02화출근 대신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