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나라의 육아인, 그러니까 하나는 가졌다는 건데..
임신 8주 차 자연유산을 확인하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말하지 말걸'
유산 이주 전, 방송작가 12년 차였던 나는 평소 원하던 프로그램 자리를 제안받았다. 3부작 특집 다큐를 끝내고 쉬던 중이었다.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지금 임신 6주예요”
“아, 그럼 안 되겠네”
답변은 한 호흡의 여유도 없었다.
그때 아무 말 없이 일했다면 몸을 혹사시켜서 유산했다는 괜한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잘한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몇 달 후, 다시 임신했고 다른 일을 제안받았다. 임신 6주에 안되던 게 임신 6개월에 될 리 없었다. 동료에게 의논하니 당연하다했다. 일하는 중이었다면 상관없지만 임신한 상태로 시작은 안 된다고. 출산으로 자리를 비워야 하니 (모든 방송작가는 출산휴가, 육아휴직 따윈 없는 비정규직 프리랜서다) 여러모로 팀에 피해라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산하자마자 바로 일하는 것도 싫었다. 무급이지만 내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건 프리랜서의 장점이었다.
출산 후 감을 잃기 싫어서 방송 모니터를 하고 있으면 친정엄마는 피곤하다고 짜증 내지 말고 애 잘 때 자라고 했다. 일하면 아이를 봐주기로 한 친정엄마가 그건 봐주고 ‘싶다는’ 바람이었다고, 수정하는 말을 듣고 나는 내가 일을 그만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개월 무렵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배우자는 어떻게든 해보자고 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나는 어린이집 하원 시간은 당연히 맞출 수 없고 일의 특성상 밤을 새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한 배우자는 회사 다닐 때보다 시간과 노력이 배는 더 필요했다. 의사표현도 정확하지 않은 아이를 모르는 사람 손에 맡기는 것도 불안했다. 그저 내가 일만 안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였다.
나는 나를 설득했다.
상상 속에서 일을 하는 나는 목 디스크가 재발했고, 잠이 모자랐고, 허둥대며 실수했고, 빨리 등원하자고 아이를 다그쳤다. 일에서 받을 에너지, 출산 전 세상과 이어질 관계는 모른 척, 곤란했던 상황만 골라서 편집했다.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난다, 낮잠 시간에 안 잔다, 토스트를 먹고 토하다 축 늘어졌다(달걀 알레르기가 있다)고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을 때, 아토피, 수족구, 농가진. 일을 하지 않은 건 옳았다고 수없이 되뇌었다.
최근 코로나 19가 일상이 되면서는 말할 것도 없이. 거봐, 안 하길 잘했지?
아이가 네 살이 되고부터 일을 하자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굳이 아이 있는 경단녀를 쓸 이유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고,
어떤 이는 니가 의지가 부족한 거라고 따끔하게 충고했고,
어떤 이는 아이 다 키워놓고 해도 늦지 않다는 교훈적이지만 내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 희망을 줬다.
때론 그들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 끝났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지. 그건 욕심이지”
그러니까 하나는 가졌다는 건데.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일까. 아이는 소유물이 아닌 함께 사는 작은 인간일 뿐인데 말이다. 일과 육아를 완벽하게 해내면 둘 다 가지는 것일까? 완벽이 애초에 불가능하니 둘 다 가질 수는 없다고 하는 걸까? 일하고 싶어서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듣는 ‘넌 그래도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잖아’라는 말도 이해 안 되긴 마찬가지다. 아이의 아빠는 정반대의 말을 듣지 않을까? ‘넌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까 일을 해야만 해”
언젠가 취재했던 미국의 글로벌 기업 SAS에서 촬영한 장면이 떠오른다. 출근한 엄마가 사내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업무를 보다가 점심시간에 아이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위한 일이면 특별휴가를 신청하고, 주 35시간을 원칙으로 근무시간은 각자 알아서 정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환경이라면 둘 다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육아가 남 일이었던 그때나 육아가 내 일이 된 지금이나 그들의 복지는 나와 상관없는 TV 속 환상 같다. 일단, 나의 아이는 절대 내가 일했던 방송사의 어린이집에 다닐 수 없다. 내가 아무리 한 방송사에서 10여 년을 일했다 해도, 거기서 샐 수 없이 밤을 새웠다 해도 말이다.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밤새 졸면서 촬영 테이프를 돌려 보다가 유치원 상담 날이라고 세수도 안 하고 뛰어나가던 선배를 본 기억이 있다. 엄마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할머니 손을 잡고 로비에서 기다리던 선배의 딸을 본 적도 있다.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말하던 그때의 나는 ‘저렇게’ 사는 것도 나 혼자 결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아이를 낳은 뒤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선배들이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제야 궁금하다.
‘어쩔 수 없이’였을까. ‘기꺼이’였을까.
올해부터 집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코로나 시대 비대면 강의 영상물을 만들거나 기업의 유튜브 채널을 만드는데 작가로 참여한다. 재미와 의미,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로 일을 선택했던 6년 전과 달리 출퇴근 여부와 일의 강도를 먼저 체크한다. 아는 분야의 활동은 자신감과 에너지를 급속 충전시켜 준다. 동시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니까 맥이 빠지기도 한다. 그나마 그런 일도 귀해서 지금 하는 작업이 끝나면 다음 일까지의 텀이 몇 달이 될지, 할 수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일을 하건 하지 않건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화가 난다. 나도 모르게 아이 돌봄의 주체가 엄마임을 내면화하고 있었다는 것이, 6년의 아이 돌봄이 일 할 의지와 능력 없음으로 평가되는 것이,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아이와 함께 사는 게 둘 다 가지는 거라면, 둘만 가질 게 아니라 셋, 넷, 다섯 내키는 대로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지는 욕심쟁이가 되고 싶다. 아, 물론 이젠 알고 있다. 내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