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우리는 고3이었다.
그 답답하고도 불안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난 처음 술을 접했다.
함께 했던 친구들의 눈을 빌어 그 날의 이야기를 한다.
“고마리가 독서실을 끊었대. 그런데 여기가 아니라 믿음 독서실이래!”
수능 시험을 6개월 남겨 두고 그 녀석이 드디어 독서실을 끊었다.
그 녀석을 제외하고 동네 친구들이 모두 독서실을 다니는데 그 녀석만은 독서실을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독서실을 끊었다니, 그런데 여기가 아니라고?
하긴 그 녀석은 좀 독특하기는 하다. 친구들 모두 서태지를 좋아하는데 혼자 신해철을 좋아하지를 않나, 친구들 다 하는 과외도 독서실도 안 다니고 그렇다고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우리들과 항상 함께 다닌다.
생각해 보니 몇 달 전 그 녀석이 우리 독서실에 한 번 온 적이 있다.
부광 독서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다음 날이었다. 독서실을 다니려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한 집에 같이 사는 아랫집 정훈이가 오늘 학교에 안 왔다고 찾으러 왔었다. 정훈이는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중학교 때 가출을 한 적이 있는 놈이다. 그때는 정말 가출을 해서 며칠이 지난 후에 돌아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출이 아니라 술에 취해 독서실에서 자느라 학교를 못 갔다. 그 녀석에게 가출한지 걱정이 되어서 왔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고 독서실에 있을 건 알았는데 확인 차 왔다고 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독서실 구경하러 왔다고 했다. 하여간 특이한 녀석이다.
하긴 그때가 한참 독서실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을 때였고 그 녀석에게도 독서실에 같이 다니자고 열심히 꼬드기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 녀석은 항상 독서실은 싫다고 했다. 그런데 구경을 오다니! 이제 독서실 다닐 생각을 한 건가? 나랑 몇 놈은 신이 나서 독서실 투어를 시켜 주었다. 독서실은 4층과 5층에 있었다.
3층은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는 우리가 학교 끝나면 항상 바로 달려오는 우리의 아지트 당구장이 있었다. 위층 독서실에 왔다는 핑계로 이 당구장은 교복을 입고 와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독서실에 있다가 아무 때나 내려와서 한 게임 칠수도 있어서 독서실 다니지 않는 친구들도 많이 오는 곳이다. 2층에는 단란주점이 있었고 1층에는 우리 단골집 투다리가 있었다. 우리는 항상 별일이 없는 날이면 학교 끝나고 바로 독서실에 와서 당구를 치고 투다리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당구장에 가는 녀석도 있었고 오락실에 다녀오는 녀석도 있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독서실 옥상에 하나 둘 모였다.
옥상에는 종종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형들이 있었는데 이 형들은 하나같이 구멍이 몇 개 있는 추리닝을 입고 입에 욕을 달고 사는 형들이었다. 이 형들은 우리가 학교에 있는 시간에 당구장에 있었고 우리가 당구장에 있던 시간에는 독서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형들과 우리가 만나는 시간이 이 밤이었고 우리는 몇 점 없는 고기와 형들의 욕을 안주 삼아 함께 술을 마셨다. 형들은 이 건물을 벗어나면 안 되는 저주라도 걸린 건지 항상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술 사와라~ 담배 다 떨어졌다~ 옆 시장에서 순대 사와라~ 상관없다. 우리는 건물 밖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고 돈도 형들이 주니까. 옆 건물 인력사무소 양아치들처럼 돈을 빼앗지는 않는 착한 형들이었다. 이미 몇몇 친구들은 학교 졸업하면 저 형들과 함께 공무원 시험을 볼 계획이었다. 중간고사를 망쳤다고 정훈이는 어제 저 형들과 함께 과음을 했다. 같이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라고 깨우려고 했는데 독서실에 없었다. 항상 자던 구석 자리에는 형들만 자고 있었고 혹시나 정훈이 자리에 가 보았는데 가방과 교복 상의만 놓여 있었다. 찾다가 학교 갈 시간이 되어 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렀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한 칸 있는 남자 화장실이라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행이 화장실은 위쪽 공간에 벽이 없어서 위에 매달려 화장실 안을 보았는데 정훈이가 누워 있었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기에 걱정이 되어 넘어가서 보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단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는데 술냄새가 화장실 냄새를 덮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깨워도 정훈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시계를 보니 다른 상은 다 못 받아도 개근상은 받아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이 생각났다. 더 지체하면 버스를 놓쳐 지각을 할 상황이라 화장실 문만 열어 놓고 난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찾으러 왔다기에 정훈이를 찾아보니 지금은 화장실이 아닌 옥상에서 형들이랑 라면에 해장술을 하고 있었다. 여튼 이 녀석에게 계속 독서실 투어를 시켜 주었다. 옥상까지 다 투어를 시켜주고 나서 같이 다니자고 했더니 자기는 독서실에서는 공부가 안 된다고 안 다닌다고 했다. 독서실을 한 번도 안 다녀 본 녀석이 저런 말을 하니 다른 문제인 것 같아서 생각을 해 보려다 귀찮아 당구나 한 게임 치고 가라고 했더니 당구는 재미없어서 안 친다고 한다. 하여간 특이한 녀석이다. 자려고 누워도 천장에서 공이 굴러다니는 이 재미있는 당구를 유일하게 저 녀석은 재미없어 한다. 기다렸다 투다리에 가자고 했는데 집에 가서 저녁 먹는다며 집에 갔다. 그날이 그 녀석과 독서실은 마지막이었는데 그런 녀석이 독서실을 끊었다니!
믿음 독서실
고마리가 이 독서실이 아닌 사거리 건너 믿음 독서실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은 믿음 독서실로 옮겼다. 때마침 공무원 시험 공부하는 형들의 욕과 무용담도 시시해지기 시작했고 독서실에 친구들이 많아져서 당구장이나 투다리도 빈자리가 없을 때가 잦았다. 슬슬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고마리가 새로운 아지트를 만든 것이 아닌가!
믿음 독서실은 그전 독서실과 많은 것이 달랐다. 건물에 당구장이나 투다리는 없었다. 다만 옆 건물 1층에 오락실이 있어서 우린 학교 끝나고 오락실에 모였다. 우리는 보통 오락실에서 하루에 1000원 정도 쓴 것 같은데 고마리 녀석은 100원만 썼다. 역시나 특이한 녀석이다 <스트리트파이터>나 <버추얼파이터>가 아니라 퀴즈 게임만 한다. 우리가 1000원을 날릴 동안 100원짜리 동전 하나로 계속 하고 있다. 퀴즈 게임이 재미있냐고 하니 평화주의자인 자기는 이 게임이 제일 재미있다고 한다. 가끔 보면 독서실 형들보다 더 이상한 놈 같다. 믿음 독서실은 그전 독서실과는 달리 총무형이 아닌 주인 아저씨가 관리를 했다. 10시까지 아저씨가 있었는데 술냄새가 나면 출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 술을 먹은 녀석들은 독서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계속 술을 마셨다. 이전 독서실과 많은 것이 달랐지만 같은 건 하나 있었다. 여기에도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는 형들이 있었다. 신기하게 이 형들도 구멍 난 추리닝에 욕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면 나도 추리닝에 멋진 빵꾸를 좀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실 아저씨의 디펜스로 믿음 독서실 옥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형들은 야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고 있었다. 오락실 맞은편에 양로원이 있었는데 좁은 골목에 유일하게 앞마당이 있었다. 10시가 되면 양로원도 오락실도 독서실도 모든 아저씨들이 집으로 갔고 양로원 앞마당에는 마치 거기에 있던 것처럼 추리닝 형들이 소주와 라면을 먹으면서 욕을 하고 있었다. 십여 미터만 가면 새벽까지 하는 슈퍼도 있고 오르락내리락 계단도 없어서 정말 편하게 야식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믿음 독서실에서 다시 둥지를 틀었고 여전히 돈독한 우정을 다지고 있었다. 야식은 같이 안 하지만 여전히 같이 잘 놀면서 너희 독서실로 꺼지라고 말하는 그 녀석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100일 주
수능이 백일 남았다. 이미 며칠 전부터 친구들은 들썩이고 있었다. 어디에서 누구랑 백일주를 마시는지가 주된 이유였고 모든 학원, 독서실, 그냥 친구 여기저기서 백일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전 독서실에 아직 남은 친구들이 전해 준 소식은 백일 날 독서실 옥상에 부르스타가 아닌 숯불을 피울 거라며 오라고 했고 총무 형이 소주 한 짝을 쏜다고 했다. 나는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예전 독서실에 갔다. 입구에서부터 반갑게 맞이하는 녀석들이 있었고 투다리부터 당구장까지 소주 향기가 가득했다. 덕분에 퀴퀴한 독서실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옥상에 가니 교복 입은 친구들과 추리닝 형들이 잔뜩 취해 있었다. 반가워서 형들 시험은 며칠 남았느냐고 물어보니 찰진 욕으로 화답을 해 주었다. 나는 학교 끝나고 바로 왔는데 이미 숯불은 다 꺼져 가고 있었고 총무형이 쏜 소주 한 짝은 병은 다 어디 가고 빈 짝만 남아 있었다. 고향에 왔으니 예전에 하던 대로 우선 당구를 쳤고 투다리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꼬치는 냄새가 났고 찌개에는 고기가 보이지 않았다. 허기가 져서 옥상에 올라가려다 문득 난 믿음 독서실을 다니고 있다는 게 생각이 났고 믿음 독서실 녀석들과 백일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봤는데 아직 8시였다. 10시 전이라 어짜피 지금 이 시간에는 아직 못 들어가니 그냥 옥상에 가서 불어터진 라면에 소주를 좀 더 마셨다. 라면을 좀 먹다가 믿음 독서실에 있을 그 녀석들이 생각이 났다. 그래도 사람이 의리가 있지 같이 마시던 믿음 독서실 녀석들에게 우리 독서실에 가자고 이야기 했다. 시계를 보니 신기하게도 10시였다. 사거리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던전들을 뿌리치고 우리는 믿은 독서실에 갔다. 독서실 앞 골목은 오늘이 수능 백일인데도 여전히 똑같이 어둡고 조용했고 양로원 할머니들처럼 힘이 없어 보이는 형들이 양로원 마당에 모여 있었다. 형들이 오늘은 왜 늦게 왔냐고 물어봐서 오늘 수능 백일이라고 이야기했다. 형들에게도 형들은 며칠 남았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단어는 달랐지만 욕으로 화답이 왔다. 아무래도 공무원 시험 과목에는 욕이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 나이도 욕도 제일 짱인 예비군 형이 수능 백일인데 독서실에 있는 애들은 뭐하는 것들이냐며 끌고 나오라고 했다. 수능 백일에는 백일주를 마셔야 수능을 잘 본다고 했다. 자기는 백일주를 못 마셔서 수능을 못 봤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했다. 수능은 작년부터 있었고 그 형 때는 학력고사였으니까 어찌 보면 수능 백일주는 못 마신 것이 당연했다. 아저씨가 퇴근한 후 독서실은 추리닝 형들이 지배자였고 어렵지 않게 녀석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돈을 모아서 골목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슈퍼에 갔다. 다들 술을 고르는데 고마리 녀석은 자기는 안 마시면 안 되느냐고 했다. 너 수능 잘 보려면 오늘 마셔야 한다고 형들과 우리는 몰아붙였고 분위기에 못 이겨 녀석도 술을 골랐다. 그런데 소주가 아니라 버드와이저 한 병을 골랐다. 왜 그걸 골랐느냐고 하니 그 녀석 외갓집이 전통적으로 술을 못 마시는 유전자라고 한다. 자기는 어차피 못 마시고 이 한 병이 끝이니 작은 맥주병인 버드와이저를 마시겠다고 했다. 하긴 소주 세 병보다는 싸지. 그 녀석 말이 맞았다. 술도 혼자 다른 걸 고르고 역시나 특이한 녀석이다. 술과 과자를 사서 들고 나오는데 예비군 형이 자기가 고기를 쏜다고 하며 스팸을 하나 샀다. 독서실 고3 아이들이 다 모이고 맨 앞에는 스팸을 높이 든 예비군 형이 앞장을 섰다. 슈퍼에서 양로원 앞마당까지 우리는 즐겁게 행진을 했다. 양로원 앞마당은 이십여 명이 삥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넓었고 그 한가운데 스팸이 놓여 있었다. 스팸까지 젓가락은 닿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형들의 학력고사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술을 마셨다. 형들은 하나같이 답안지를 밀려 썼다고 했다. 급기야 누가 더 많이 밀려 썼는지 싸우고 있었다. 나도 공무원 시험을 보려면 수능 답안지를 밀려 써야 하나 잠깐 생각했다. 한참 술을 마시다 보니 고마리 녀석은 비싸게 산 버드와이저는 따지도 않고 새우깡만 처먹고 있었다. 목도 안 마른가? 오락실 간판 불빛에 반짝이던 버드와이저 병뚜껑은 역시나 예비군 형의 눈에 들어왔다. 시험 망치기 싫으면 12시가 되기 전에 마시라고 예비군 형이 멋지게 나무젓가락으로 힘들게 병뚜껑을 따서 고마리한테 주었다. 버드와이저는 돌려 따는 건데 저걸 나무젓가락으로 따다니 역시 학력고사 세대는 달랐다. 고마리는 여전히 자기네 외갓집 이야기를 하면서 마시지 않고 주저하고 있었다. 예비군 형은 맥주는 술도 아니라며 사이다 마시듯이 벌컥 마시라고 했다. 우리도 다 쳐다보며 눈빛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급기야 예비군 형이 너 소주 마실래 맥주 마실래 협박했고 급기야 그 녀석은 작은 병이기는 했지만 버드와이저 반 병을 벌컥 마셨다. 하기야 새우깡만 먹고 있었으니 목도 말랐겠다 싶었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쳤고 예비군 형은 양로원 앞마당에서 듀스 춤을 추며 계속 술을 마셨다.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고마리 녀석이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프냐고 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고 했다.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너무 아프다고 했다. 예비군 형이 저건 술을 덜 마셔서 그런 거라고 하면서 남은 버드와이저 한 병을 그 녀석 입에 대었다. 그 순간 고마리 녀석이 골목 구석으로 달려갔고 우리는 저 녀석 왜 저러지 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 구석에서 고3의 아픔을 내지르는 고통의 울림이 울리고 있었다. 꼬마 때부터 알았는데 저 녀석이 저런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얼마전에 본 <에일리언> 영화가 생각났다. 마치 저 녀석 입에서 외계인이 나오는 것처럼 고통에 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외갓집 친척들이 전통적으로 술을 못 마신다고. 조금 있다 그 녀석은 정말 외계인 한 마리를 뿜어낸 것처럼 매우 힘든 모습으로 기어서 양로원 으로 왔다. 상태가 정말 안 좋은 것을 직감한 우리는 녀석을 독서실로 데려갈지 집으로 데려갈지 논의했고 예비군 형은 12시가 지났다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재우는 게 편하긴 하지만 중간고사 때 정훈이 사건도 있고 그 녀석이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집에 데려다 주었다. 집에 가는 동안에도 온몸이 너무 아프다고 계속 힘들어했다. 양쪽에서 부축해서 가는데도 거의 기어서 집에 갔고 이렇게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있는 걸 우리는 신기해했다. 그 녀석을 데려다 주고 우리는 다시 양로원으로 갔다.
9땡 주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믿음 독서실에 갔다. 고마리 녀석은 좀 늦게 왔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밤새 온몸이 너무 아파서 잠을 자기도 힘들어서 새벽에 겨우 잠들었는데 지금은 신기하게 하나도 안 아프다고 했다. 하긴 감기도 잘 안 걸리는 건강한 놈이긴 하니까 금방 회복이 되었나 보다. 오늘도 오락실에 갔다가 독서실에 올라갔더니 추리닝 형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늘은 수능 99일 전이니 구땡주를 마셔야 한다고 했다. 10시가 되자 형들은 우리를 데리고 또 양로원으로 갔다. 이 형들이 청소를 할 사람들이 아닌데 양로원 앞은 항상 깨끗했다. 이 점이 양로원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은 스팸과 버드와이저는 없었지만 구땡주라고 구구콘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었다. 조용히 구구콘을 먹고 있는 고마리에게 형들이 술을 권했다. 어제의 그 참상을 저 형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공무원 시험 공부는 많이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 저 힘든 공무원 시험 공부를 내가 할 수 있을까? 어제처럼 외갓집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다하는 그 녀석에게 한 형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넌 생긴 게 토종인데 어제 외제를 마셔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토종을 마셔 봐.
형은 고마리에게 진로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역시나 양로원 앞마당의 모든 사람들은 눈빛으로 강요하고 있었고 분위기에 눌린 녀석은 급기야 맥주도 아닌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맥주도 못 마시는 녀석이 소주를 입에 넣는 순간 오늘은 <에일리언> 2인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흐를 때 내는 그 “캬아”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냥 물을 마신 것처럼 아무런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역시 공무원 시험 공부하는 형이라 배려심에 소주가 아닌 물을 주었구나 하며 그 형에게 따봉을 날렸는데 그 형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거 소주야 임마.”
라고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진한 소주가 맞았다. 그 녀석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니
“이거 처음 마셔 봤는데 물 같은데?”
라고 답변했다. 역시나 특이한 놈이다. 맥주 반 병에 무너지던 녀석이 소주 원샷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다니! 그날 우리는 계속 그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 녀석은 소주와 새우깡을 계속 먹었다. 형들이 비틀거리며 양로원 앞마당에서 듀스의 춤이 아닌 봉산탈춤을 추고 있을 때도 그 녀석은 <에일리언> 2가 아니라 너무나 평온하게 웃으며 마치 평소처럼 집을 걸어서 갔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수능 보기 전까지 매일 밤 양로원에서 소주를 마셨다. 버드와이저 병 앞에서 주저하는 그 녀석에게 그날 우리가 한 눈빛으로 수능 전날까지 우리를 쳐다보며 그녀석은 우리에게 소주를 먹였다.
우리는 가끔 그날을 기억한다. 버드와이저 반 병 그 한 모금에 몸부림치면서 고통스러워 하던 것은 외가 쪽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말술을 마시는 친가 쪽 유전자의 봉인이 풀린 날이라고!
그 봉인이 풀린 날 이후 녀석이 우리 친구 중에 술 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