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 쉽지 않다.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는 상대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납득시키고 싶은 마음. 그녀가 쏟아내는 말의 칼날에 다쳐서 오랜시간 잠 못 드는 마음. 사실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필요없는 물건을 갖고 싶은 마음. 원하는 구인공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애가 타는 마음. 내가 양보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말 안 해도 알아서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애정을 바라는 마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요구하는 마음. 상대를 쥐락펴락하고 싶은 마음. 아무것도 손해보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만 딱 얻고 싶은 마음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말이 안 되고, 이기적인 것 같고, 과한 욕심인 걸 아는 모든 순간에도 나는 그 마음들을 엉거주춤 들고 절대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내가 싫다.
최근 부산 여행엘 갔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미리 알고 있긴 했었지만 우산을 가져가진 않았다. 나는 가방이 무거워지느니 홀딱 젖으며 돌아다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얼마나 오겠어. 이슬비정도겠지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린 부분도 있다. 그러나 여행에 있어서 맘대로 희망회로를 돌리면 무조건 실망하기 마련이다. 역시나 비가 쏟아졌다. 사실 이정도 양의 비는 평소의 나같으면 비 사이로 막 가 스킬로 우산 없이 돌아다닐 정도였지만, 뭐랄까 나는 맏언니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편의점 장우산 9천 원 결제. 속으론 우산을 돈 주고 사다니. 집에 널린 게 우산인데!하며 돈을 아까워했지만 겉으론 쿨한 척했다. "여행 와서는 조금의 불편함도 감수해선 안 되는 거야. 우산 사길 잘했어." ...ㅋㅎ
잘하긴 개뿐. 비는 버스 타러 가기 전까지 쏟아지던 비는 도착지에 도착하자 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췄고, 내가 우산을 쓴 시간은 도합 5분도 안 됐다. 우산 사지 말 걸. 진짜 안 사고 싶더라니. 나는 하루 만보 넘게 걷는 강행군 내내 70cm 짜리 우산을 질질 끌고 다녔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짐을 싸온 배낭 가방꼬리에 우산을 걸어두고 돌아다녔다. 체감상 가방 무게 6톤이었다. 거북이 체험을 하며 거북이랑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마 거북이들 성격 개더러울 거다.
그냥 우산을 버릴까. 9천 원 날린 거라고 생각할까. 고민했지만 여행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부터는 오기가 생겼다. 지금까지 이걸 이고 지고 돌아다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어느 순간엔 끝까지 우산을 포기하지 않은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난 기차에 우산을 두고 내렸다.
허무하다. 우리 서울까지 함께 잘 왔잖아. 서운해. 너 왜 나 안 따라내렸어. 뭐라고? 따라잡을 새도 없이 내가 휑하니 먼저 내렸다고? 그래. 미안하게 됐다. 근데 그럼 지난 이틀 간의 나의 고생과 오기는 뭐였어? 그렇게 쉽게 두고 내릴 거였으면서 내 진짜 마음은 뭐였던 거야? 모르겠다. 확실한 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날렸다는 것. 바보 같은 나.
휑해진 손으로 집엘 오며 우산이 참 내 마음같다고 생각했다. 내게 곤란만 안겨주는 마음을 가지고, 놓고 싶다고 생각만 가득 결국 절대 놓지 못하면서, 어째선지 허무하게 흘려보내곤 지난 모든 순간을 후회하는 것. 어차피 끝까지 데리고 갈 것도 아니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소중해서 내내 짊어지고 있는 걸까.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 하고 있는 나로선 항상 궁금했다. 마음을 어찌저찌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고 쳐. 어디에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며, 내려놓은 마음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건데. 그걸 알아야 내려놓을 거 아니야. 그리고 오늘, 그 마음 이제 기차에 내려놓겠다고 결심한다. 달리는 기차에 마음을 내려놓고 몸만 쏙 빠져나오는 거야. 나는 가벼운 손으로 아늑한 집으로 가는 거지.
기차와 함께 나를 떠난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그 기차에 다시 타는 날이 오더라도 내가 두고 내린 그 마음을 만날 수는 없어. 이제는 기억 나지 않는 과거의 고민과 상념들, 나를 영원히 떠난 채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오늘의 이 마음들도 언젠간 나를 떠나고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침대에 누워 머릿속에 나만의 기차를 그렸다. 두껍고, 연기가 나고, 창문이 많은 기차였다. 모든 좌석이 순방향인 의자에 상념들이 앉아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승강장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