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회에 출전한 (구) 바둑신동

영화 '오목소녀'

by 곰B
A201805210409_3_20180521155223549.jpg 영화 '오목소녀' 포스터


철없던 시절 무시하던 것들이 있었다.


학교에서 보조 교재로 채택한 문제집 → 중간에서 커미션 받고 구린 문제집을 고른 거라 억측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대학교 → 나 정도면 당연히 쉽게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

군인 → 되기 전엔 몰랐지


구린 문제집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분명 틀리는 문제가 있었고, 집 근처 대학교는 내 수능 점수론 갈 수 없었던 학교였다. 내 주제를 모르고 무시한 거였다. 군인은... 지금 알고 있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만나는 군인마다 영혼을 담아 힘내라고 해줬을 거다.


무지하기 때문에 무시한다. 이바둑(박세완)도 그랬다. 한때 바둑신동으로 불리며 지금도 기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녀는 오목을 무시했다. 대회가 있다는 것도, 정식 룰이 존재한다는 것도, 포석 법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movie_image.jpg '오목소녀'로 배우 박세완에게 반했다.


사실 이바둑에겐 자신도 몰랐던 오목의 재능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겉으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오목계 최고수 김안경(안우연)이 발견한다. 오목을 무시하던 이바둑은 김안경과 붙어보기도 전에 치욕을 당하고, 김안경의 사부 쌍삼(김정영)을 찾아가 제자로 거둬주기를 부탁한다. 이처럼 ‘오목소녀’는 오목을 무시하던 이바둑이 진지하게 오목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마치 한편의 무협지를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오목소녀’의 톤은 가볍다. 그야말로 병맛에 취한다. 이바둑, 김안경, 쌍삼, 조영남, 동거인 등 재미난 인물들의 이름은 ‘오목소녀’가 가진 병맛의 맛보기일 뿐이다. 영화 곳곳 숨어있는 깨알 같은 드립들과 B급 감성이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57분 동안 관객을 즐겁게 한다.


movie_image (4).jpg 실패하는 것이 두렵다면 '오목소녀'를 보길.


주인공 이바둑 역의 박세완은 영화관을 나오며 포털에 이름을 검색하게 할 만큼 빛나는 연기력을 보여준다. 메인 빌런(?) 김안경 역의 안우연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일품이다. 맹랑함이 돋보이는 조영남 역의 이지원, ‘내 친구 이바둑’이란 명곡을 부른 동거인 역의 장햇살도 빼놓을 수 없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오목소녀’의 캐릭터들은 모두 사랑스럽다.


웃길 생각에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는다. 확실하게 웃기고 소소한 화두를 던진다. 매일 목숨 걸고 한 수 한 수를 둬가고 있는 오늘의 ‘이바둑’들에게 인생은 오목처럼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서른 살이 넘도록 뭔가 이루지 못한 사람을 무시했던 철없는 시절이 있었다. 무지했기 때문에 무시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나는 잘 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고, 아직 꽃을 피우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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