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별사탕 같은 내 마음
희옥은 장녀였다.
봄이 와도 씨앗은 남의 밭에 먼저 뿌리고,
여름이 와도 그늘은 제 몫이 아니었다.
그 시절 장녀라 하면 계절보다 먼저 여물어야 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해마다 순서가 있었다.
3월, 모판 위 얇은 흙을 가르고 씨앗을 흩뿌렸다.
4월, 허리를 반쯤 접은 채 연둣빛 모종을 밭으로 옮겼다.
7월-8월,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 아래부터 담뱃잎을 하나씩 뜯었다.
머리까지 올라오는 잎담배들 헤치며,
손에는 늘 끈적한 점액에 절어갔다.
태양에 데워진 그 냄새는 묘하게 달고, 또 매캐했다.
한 장, 한 장
엎드린 허리는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무감했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면 담뱃잎에서 올라온 기운이
코와 목을 파고들었다.
어릴 때에는 그걸 '어지럼 냄새'라 불렀다.
가끔은 속이 울렁거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늘은 동생들의 차지였다.
장녀에게 허락된 건 잠깐의 숨 고르기와 땀 훔치기였다.
학교에 가기 전,
희옥은 마당 한쪽 뽕나무에서 이파리를 똑, 똑 따냈다.
두 손으로 잎을 잘게 부숴 누에밥으로 내주면
하얀 벌레들이 부지런히 씹어댔다.
누에집은 방한 켠,
희옥의 책가방보다도 귀한 자리였다.
밤낮으로 누에를 살피며 열심히 키우면
돈이 됐다. 그렇게 일궈낸 누에는 아버지가
공장에 팔아 돈을 받아왔다.
그 돈이 밥상 위에 오르기도 전,
고스란히 도박판에 던져졌다.
돌아오는 건 비어버린 손과
가난이 한 뼘 더 깊어진 집뿐이었다.
희옥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꾸도, 저항도 없이 그냥저냥 그렇게 살았다.
그 시절 많은 여인네들이 그러했듯이.
저녁이 될 무렵이면 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머니를 쥐 잡듯 잡고, 물건이 없어지면
다 너희들 탓이라며 6남매에게 화살을 돌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길바닥에 드러눕거나
이웃집 담을 두드리며 행패를 부렸고,
여자를 쫓아다니는 행실은
곧 동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주정뱅이, 바람둥이'라는 수군거림 속에서
희옥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희옥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술상을 엎었고,
희옥의 어머니의 눈빛은 아들 쪽으로만 가있었다.
그 집에서 태어나자마자 배운 것은
먼저 포기하는 법이었다.
"장남만 학교 가면 되는겨, 너는 고등학교 생각 말아라."
"여자가 무슨 핵교여! 집에 와서 일이나 혀."
"오빠 뒷바라지나 혀!"
아버지의 그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희옥의 귀에 못처럼 박혔다.
책을 펼칠 때마다, 교실 창밖을 볼 때마다
그 못이 속살까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포기하는 법만 배워오던 희옥에게
누군가의 호의는 늘 대가가 따라오는 법이었다.
그래서 처음, 태산이 웃으며 건넨 사탕과 말 한마디조차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의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다정함은 빚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세상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건,
태산뿐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