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끝나지 않을 길 위에서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서는
희옥이 보이자 빠르게 뛰어 오는 태산이었다.
"이거 봐라 이거 들고 오느라 좀 늦었어."
그의 품안에 있던 종이봉투 속에는 따끈한 호빵이 있었다.
"밥 먹으러 가는데 웬 호빵이야?"
"네가 좋아할 거 같아서."
그의 이유는 항상 단순했다.
그리고, 단순한데, 신기하게 모두 맞았다.
밥집까지 가는 동안 그는 계속 무언가를 건넸다.
귤 한쪽, 사탕, 목도리.
길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희옥의 손에 뭔가가 쥐어졌다.
"이건 귤, 감기에 좋다네?"
"사탕, 달달하면 기분 좋아진다니까?"
"자~목도리는 추니까."
희옥은 그저 받아 들고만 있었다.
오늘 하루가 '태산의 소유권 이양식'이라도 된 듯,
그 앞에서 모든 것을 인수받는 사람처럼.
그의 호주머니가 점점 비워질수록,
그녀의 손은 이상하게도 더 무거워졌다.
백반집 문을 열자,
주인아주머니가 태산을 보며 웃었다.
"또 왔네, 오늘은 여자친구 데리고 왔네~"
태산은 아무렇지 않게,
"네, 제 전 재산입니다!" 하고는 웃었다.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괜히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식사 내내 그는 내 접시를 살폈다.
고등어 살을 발라 내 접시에 올려주고,
된장찌개에서 건더기만 골라 담았다.
"네가 잘 먹어야 내가 오래 살지."
"그게 무슨 논리야."
"네가 안 먹으면 내가 속상해서 단명하거든요.
그리고 내가 단명하면, 누가 당신 고등어 발라주겠어요?"
희옥은 젓가락을 들다 말고 웃음이 터졌다.
그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얼굴로 또 말했다.
"그러니까 많이 먹고, 오래 살게 해 주세요.
당신은 내 장수 비결이니까."
능글맞게 농담하는 태산 때문에
희옥은 웃기면서도,
어쩐지 가슴이 데워지는 것 같았다.
차갑던 마음 한편에 온기가 번졌다.
밥을 다 먹고 나오는데,
그가 희옥의 손을 꼭 잡았다.
"근처 다방 가서 커피 한잔 할까?"
희옥은 끄덕이며, 잠깐 그를 올려다봤다.
찬바람에 손끝이 시렸지만
항상 그의 손은 따스했다.
길가에 네온 간판들이 켜지기 시작하고,
빵집, 사진관, 그리고 유리문에 '길거리다방'이라고
적힌 간판 유리문을 열자, 안쪽에서 딸랑하고 종이 울였다.
은은한 담배 연기와 구수한 커피 향이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창가에는 꽃무늬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구석 DJ부스에서는 느린 팝송이 흘러나왔다.
창가자리에 자리를 잡고 밖을 구경했다.
여유로운 시간이 행복한 희옥이었다.
둘은 따뜻한 유자차와 쌍화차를 시켜
컵을 맞바꿔 가며 맛평가를 해댔다.
"저는 이게 더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산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 태산씨 입이 맛간거 아니에요?"
희옥이 웃음을 참으며 되받았다.
"음.. 그렇군요. 제 입이 맛탱이가 갔습니다."
그는 괜히 턱을 긁적이며 심사위원 흉내를 냈고,
희옥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심사위원 둘은 그들만의 대회에 빠져
세상에 단둘만 남은 듯 깔깔대며 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둘은 빈 잔만 남은 테이블을 뒤로하고 다방을 나섰다.
'딸랑' 종이 울리고,
찬바람이 장난처럼 두 사람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덕에 둘을 더 바짝 붙었다.
태산이 희옥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집까지 걸어가자. 오래 보고 싶어서."
그 말에 시선이 살짝 흔들린 희옥이었다.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그의 손이 온기를 전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조금이라도 오래, 이 거리를 같이 걷고 싶어서.
태산이 희옥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이 속도면 집까지 세 시간은 걸리겠는데?"
둘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괜히 오래갔다.
서로 입김을 불어대며,
조잘조잘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얼어있는 입으로 둘은 신나게 떠들며 집으로 향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걷는 시간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 건.
그리고 짧다는 게 아쉬운 건.
끝날 것 같지 않은 길 위에, 두 사람이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처럼, 그들의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두 그림자가 포개질 때마다,
시간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