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달콤한 밤, 쓰디쓴 그림자
어느덧 시간을 흘러 무더운 여름이 끝날쯤.
선화극장 간판에 불빛이 꺼지고,
인파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희옥은 아직도 귓가에 영화 속 대사가 맴도는 것 같았다.
옆에선 땅콩봉지를 비워 든 태산이 고개를 기울였다.
"희옥, 솔직히 나 때문에 영화 내용 반은 놓쳤지?"
"에에 뭐래?"
"내 옆에서 심장 떨려하는 거? 다 들렸어~"
"이상한 소리 하지마"
"그럼 귀가 좋은 내가 헛들었나 보네~?"
희옥은 괜히 땅콩을 집어 태산 입에 쑤셔 넣었다.
태산은 오물거리며 웃다가, 일부러 과장되게 존댓말을 했다.
"아이고 영광입니다! 누님께서 직접 먹여주시다니!"
"누님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나 해라!"
그러면서도 입가가 사르르 말려 올라갔다.
극장 옆 분식집 라디오에서는 전영록의 불티가 흘러나왔다.
가득 차있는 어묵국물, 스뎅그릇에 올려진 떡볶이.
어느새 희옥과 태산은 분식집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이다병에 꽂힌 빨대 두 개.
태산은 빨대를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옥아 이거 같이 빨면 간접 뽀뽀 되는 거 아냐?"
희옥은 얼굴을 홱 돌렸지만, 귓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산은 그런 희옥이 귀여웠는지 마시던 사이다병을
희옥의 입에 가져다 댔다. 희옥은 입을 삐죽 대며 마셨다.
"으휴! 이 장난꾸러기야"
"내가 장난꾸러기요? 당신이 아니고요?"
"어휴! 정말!"
"하하하하하하"
태산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사이다병을 비워놓고는 계산을 치렀다.
분식집 문을 나서자 밤공기가 꽤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시내는 아직 사람들이 붐볐지만,
집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서서히 인파들이 사라졌다.
길가 포스터에 붙은 풀들이 바람에 들썩이고,
전봇대 불빛에 작은 벌레들이 맴돌고,
길모퉁이 포장마차에선 튀김기름냄새가 은근히 풍겨왔다.
희옥은 오늘 하루가 꿈처럼 가벼워 발검음조차 붕 뜨는듯했다.
태산은 괜히 보폭을 늦추며,
옆에서 나란히 걷는 희옥의 손등을 힐끗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희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희옥, 오늘은 공기가 달달하다 그치?"
"치 능글이"
태산은 웃으며, 희옥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집 앞 골목으로 접어들자, 노란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퍼졌다.
희옥의 집이 점점 다가오던 그때, 동생 희수가 집 앞에 서있었다.
짧은 치마, 지저분하게 구불거리는 파마머리, 진한입술을 하고선
삐딱한 눈빛으로 희옥과 태산을 훑었다.
"언니는 좋겠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있는데,
언니는 남자랑 신났지? 손까지 잡았네?"
희옥은 식겁해 손을 홱 놓았다.
"희수야, 또 왜 이래? 꼴은 뭐고! 들어가 얼른."
희수는 코웃음을 치며 골목 담벼락에 발을 걸쳤다.
"내가 왜 들어가? 내가 왜 집 나가고 사고 친 줄 알아? 다 언니 때문이지.
언니는 나 버리고 저렇게 남자랑 놀잖아. 내가 외롭지만 않았으면,
내가 왜 그렇게 됐겠냐고 안 그래?"
희옥의 가슴이 철렁 무너져 내렸다.
이미 알고 있는 동생의 과거, 그걸 자기 탓으로 몰아붙이는
동생의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태산은 어색하게 땅콩봉지를 움켜쥔 채, 희옥의 손을 잡으려다 끝내 멈추었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입술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희수는 더 비웃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길바닥 담배꽁초를 툭치며 둘을 지나쳤다.
"오늘 늦게 들어가니까 내 신경을 꺼."
"야 김희수! 너 당장 안 돌아와?!"
"왜? 내 마음이야! 언니도 언니 마음대로 하면서!"
"야!"
희옥의 말도 무시하고 잡아도 뿌리치며
도망가는 희수였다.
곧 골목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삼켜졌다.
희옥은 발끝만 내려다본 채 숨조차 못 쉬었다.
손끝이 저리고 머리가 핑하고 도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르는
감정들만 꿈틀거렸다.
태산은 그런 희옥 옆에서 말없이 그냥 그 자리에 서있었다.
사랑은 달콤했지만,
그 달콤함을 시샘하는 그림자가 늘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