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정글엔 뜻밖의 동맹이 필요하다
교실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딱히 누가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닌데,
그냥 존재만으로 피곤한 분위기.
극 내향인이었던 나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고,
웃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그저 교실 한구석에 박힌 가구처럼 있었다.
그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멍하게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딱히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몹시 불편했다.
그런데, 쉬는 시간.
갑자기 내 옆에 앉은 애가 말을 걸었다.
"너 하영이지?"
'응? 뭐지? 아, 나한테 말하는 건가?'
나는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대답했다.
"어... 맞아."
그 애는 내가 누군지, 뭘 좋아하는지,
어디 사는지도 모를 텐데 자기 이야기를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와 우리 담임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나는 솔직히 아침에 진짜 뛰쳐나가려고 했음."
"야 너 담배피냐? 난 초6부터 폈거든? 피지 마라~"
나는 그냥 '아...ㅋㅋㅋ' 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는데
그게 먹혔다.
이상하게 편했다.
심장이 막 쿵쾅대지도 않고, 눈 마주치는 게 무섭지도 않고,
그냥.... 사람 같았다.
물론 그 아이는 날라리였다.
교복도 짧게 줄이고, 화장도 진하고,
말도 거칠고, 행실이 좋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말이 통했다기보단, 그냥 대화가 됐다.
이 학교 들어오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만,
그 아이 옆자리 애간 날 보는 눈빛은 은근히 거슬렸다.
그 묘한 눈빛, '쟤 뭐냐. 왜 말 걸어?' 하는 기류.
나도 그걸 느꼈고,
잠깐 얼어붙었지만, 그냥 웃었다.
그날 하루는 희한하게,
담배 냄새도, 욕설도, 가래침도 있었지만
내가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누가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준 것도 아니고,
친해졌다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나도 대답을 해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근데 그 전부가 나에게는 꽤 컸던 것 같다.
이 정글 안에서 뜻밖의 동맹 하나가 생긴 듯했다.
그 애는 다음날도 말을 걸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는 대꾸만 하는 로봇이었지만
그 애는 마치 내가 원래 친구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좀 귀찮았다.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했고,
딱히 누구랑 얽히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근데 그 애는 자꾸 말했다.
"야 너 집이 어디야?"
"야 우리 동네로 놀러 오라니까? 사람 개 많음ㅋㅋ"
나는 애매하고 웃고, 얼버무렸지만
몇 번 툭툭 건드리다 보니 결국 한번 따라가게 됐다.
"딱 한 번만~~ 놀자~~"
그게 시작이었다.
도착한 동네는 생각보다 낯설고,
생각보다 더 거칠고 다른 세상 같았다.
노을 지는 놀이터엔 담배를 물고 웃는 무리,
교복 위에 패딩을 걸친 채로 껴안는 커플들,
처음 본 것 같은 얼굴들이 '야 쟤 누구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애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 친구야. 어때? 이쁘지?"
순간, 시선들이 내 몸을 훑었다.
그건 교실에서 느끼던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평가였다.
패션, 말투, 눈빛, 행동
그들의 세계엔 기준이 있었고, 나는 기준 밖이었다.
"야 내남친이야. 인사해~"
"얘는 내 베프. 남사친ㅋㅋ 걍 맨날 붙어 다니는 애야."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남자애들이랑 말을 섞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아니, 초등학교 졸업 이후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나는 여중 출신이었다.
그 세계는 어딘가 닫혀있고 통제된 곳이었다.
남자는 내 상상 속, TV에서만 존재했고,
렌즈나 립밤만 발라도 선생님들이 나무랐다.
그런데 지금,
담배 냄새 섞인 공기와 오고 가는 욕설들,
그리고 내 옆에서 "야 쟤 귀엽지 않냐?"라고 장난치는 남자들.
이질감이 목에 걸렸다.
그리고 약간의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정글을 처음으로 살짝 벗어난 기분이었다.
무섭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면 좀 재밌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감정이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