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그랜드투어 1편
여행은 이름 붙이기로부터 시작된다.
경기도의 구석구석을 훑는 <경기그랜드투어>의 여정을 지켜보며 문득 묘한 승부욕이 생겼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 늘 곁에 있어 오히려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도시 '인천'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2021년 9월, 유난히 높고 푸르렀던 추석 연휴.
나는 이 여행에 <인천그랜드투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익숙한 지명을 낯선 목적지로 치환하는 순간 일상의 공기는 여행자의 설렘으로 바뀌었다.
인천의 화려한 바다나 세련된 미래도시를 뒤로하고, 투어의 첫 페이지로 선택한 곳은
뜻밖에도 집에서 가장 가까운 녹청자박물관이었다.
서구 경서동의 고즈넉한 자리에 위치한 이곳은 화려한 비취색 청자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녹청자'의 투박하면서도 단단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보다는 쓰임에 충실했을 그 옛날의 그릇들.
2021년의 가을 햇살 아래 마주한 녹청자의 빛깔은 마치 이번 여행의 예고편 같았다.
녹청자의 투박한 미학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인천의 기억이 층층이 쌓인 인천시립박물관이었다.
마침 그곳에서는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시간을 깨우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전남, 경남권의 국립박물관에서 해저 유물들을 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천'이라는 렌즈를 통해 다시 마주한 해저 유물은 또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였다.
과거에 보았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지도로 연결되는 순간
전시실의 공기는 밀도 있게 변했다.
수백 년 전, 거센 물살에 휘말려 바다의 침묵 속에 갇혔던 도자기들.
그것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내 눈앞에 놓여있을 때
나는 단순히 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배를 저었던 사람들의 숨소리와 당시의 물길을 상상했다.
남도에서 보았던 해남 청자와 인천의 물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유통의 경로를 '알고 보는' 재미는 그 어떤 화려한 풍경보다 짜릿했다.
<인천그랜드투어>는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지식의 조각들을
인천이라는 현장에서 하나로 맞추는 '지적 탐험'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준 즐거움은 해저 유물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만난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곰표 밀가루'의 역사였다.
인천역 근처를 지날 때마다 마주하던 거대한 곡물 저장고(사일로).
그 안을 가득 채웠던 밀가루가 어떻게 우리 식탁에 올랐는지
그리고 인천항이 어떻게 대한민국 식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는 무척 흥미로웠다.
박물관 문을 나서며 바라본 인천의 바다는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잠긴 창고였고,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밀가루가 건너온 통로였으니까.
박물관에서 시간의 깊이를 탐험했다면 이번에는 공간의 넓이를 한눈에 담을 차례였다.
한때 해외직구까지 불사하며 다이캐스트 모형을 수집했던 나
그리고 레고에 영혼을 바친 동생. 우리 형제에게 인천도시역사관의 디오라마는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마이크로 월드'였다.
이번 #인천그랜드투어 에서 우리가 가장 고대했던 순간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1층에서 인천의 태동과 근대사를 훑고 올라가면, 이내 압도적인 규모의 도시 모형이 펼쳐진다.
우리 집 근처인 강화도의 소박한 풍경부터 구불구불한 원도심의 골목
그리고 바다를 메워 올린 송도국제도시와 영종도의 위용까지.
두 개 층을 관통하며 구성된 거대한 디오라마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치 인천이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해부하는 거인이 된 기분이었다.
정교하게 재현된 건물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작은 자동차 모형들을 보며
우리는 수집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미로 감탄을 쏟아냈다.
방금 지나온 녹청자박물관과 인천시립박물관의 위치를 모형 위에서 찾아내는 것은
<인천그랜드투어>만의 특별한 재미였다.
내가 오늘 하루 동안 이동한 경로가 이 거대한 판 위에서 한 뼘도 안 되는 선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여행의 규모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취향이 같은 형제가 나란히 서서 모형 자동차의 바퀴 하나, 건물의 창문 하나에 열광했던 그 시간.
인천은 우리에게 거대한 장난감 상자이자, 정교하게 설계된 미래 도시 그 자체였다.
정교한 디오라마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낯익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낮게 깔리는 이문세의 목소리.
그 순간, 나의 마음은 도시의 모형을 떠나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어느 장면 속으로 툭 떨어졌다.
음악은 때로 가장 정직한 안내자가 된다.
나는 홀린 듯 그 노랫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멈춘 곳에는 뜻밖에도 우리네 삶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켜온
'양은(洋銀)'의 전성시대가 펼쳐져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노란 양은 그릇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찌그러진 냄비, 빛바랜 주전자... 그것들은 단순한 주방기구가 아니라
고단했던 우리 일상을 노란 반짝임으로 위로해주던 작은 태양들이었다.
이름에 '은'을 빌려왔지만 결코 진짜 은은 될 수 없었던 금속.
하지만 진짜 은보다 더 뜨겁게 끓어오르며 우리네 끼니를 책임졌던 존재.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은은 자신이 은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세상에 사과하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비록 가짜 은일지언정 그 뜨거웠던 헌신을 그저 사랑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전시를 보며 나는 양은이 그 투박한 본심을 당당히 드러내길 바랐다.
"은이 아니라서 미안해"라는 사과 대신
"누구보다 뜨거웠던 나를 기억해줘"라는 고백을 건네주길.
이문세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그 공간에서
양은의 노란 빛깔은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게 나의 <인천그랜드투어>를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