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드 광주 5편
호캉스의 달콤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창밖을 보니
바로 눈앞에 김대중컨벤션센터가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서 AP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은
마치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미리 점지해둔 듯한 계시처럼 느껴졌다.
어제의 소설 속 우연에 이어, 숙소 앞 전시장까지
이번 여행은 '예술'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어제 미술관에서 보았던 캔버스 위의 예술과는 또 다른
날 것 그대로의 기록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전 세계 역사의 현장에서 셔터를 눌렀던 기자들의 찰나가 벽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승리, 누군가의 비극,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인간의 생명력.
보도사진은 '팩트'를 전달하지만, AP 사진전의 작품들은 그 이상의 '감흥'을 전달하고 있었다. 특히 5·18의 기억을 품은 광주라는 도시에서 마주하는 세계적인 보도사진들은 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어제 영화 <주디>를 보며 느꼈던 한 인간의 처연함이나 손장섭 작가의 화폭에서 보았던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함이, 이곳 사진전의 프레임 안에서도 변주되고 있었다.
아침의 맑은 정신으로 마주한 사진들은 이번 여행 내내 우리가 보아온 '예술'이 결국 '사람의 삶'에 닿아 있음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전시장을 나오는 길, 카메라 렌즈가 포착한 강렬한 눈빛들이 잔상처럼 남아 가슴을 두드렸다. 광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이보다 더 묵직하고 선명한 마침표가 있을까.
오픈 시간에 맞춰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간 덕분에 광활한 전시 공간은
마치 우리 형만을 위해 준비된 프라이빗 갤러리 같았다.
타인의 시선에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사진 속 인물들의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전시된 사진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찰나의 기록들을 보고 있자니 몇 달 전 예술의전당에서 마주했던
내셔널지오그래픽전의 잔상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그때는 거대한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당했다면
이곳 AP 사진전의 프레임 안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치열한 역사와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가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넘길 때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이슈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잊히기 마련이고 외면하는 진실은 반복되기 마련이니까.
광주라는 상징적인 도시에서 만난 이 보도사진들은 여행의 마지막 아침
나의 무뎠던 사회적 감각을 날카롭게 일깨워 주었다.
월요일. 예술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 월요일은 가장 고요하면서도 아쉬운 날이다.
전국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닫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제 유스퀘어 주차 대란을 뚫고 전시를 두 개씩 연타로 관람하며 일정을 꽉꽉 눌러 담았던 것도
바로 오늘이라는 '휴관의 벽'을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갤러리의 문은 닫혔지만, 광주의 맛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우리는 광주를 떠나기 전 양림동의 명소인 양인제과에 들르기로 했다.
아담한 규모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공간을 가득 채운 고소한 향기와 함께
이곳만의 시그니처 메뉴들이 가지런히 우리를 반겼다.
평소 연구하고 탐구하기를 좋아하는 동생의 '연구 목적'이라는 명분 아래 빵을 골라 담기 시작했다.
사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소박하게 몇 개 맛만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쟁반 위에 담긴 빵들을 계산대 위에 올린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숫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게 이 가격이라고?"
소박한 개수와는 달리 묵직하게 다가온 가격표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칫했다.
광주의 예술적 깊이에 놀랐던 어제에 이어
오늘은 광주 빵집의 만만치 않은 공력(과 가격)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 놀라움 또한 여행의 재미였다.
양손에 든 묵직한 빵 봉투는 갤러리를 보지 못해 비어버린
월요일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든든한 전리품이 되어주었다.
양인제과에서 빵 봉투를 묵직하게 채우고 나니 문득 지난 출장 때의 기억이 스쳤다.
당시 집으로 사 왔던 궁전제과의 나비파이를 한입 베어 물고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던 그 맛.
그 바삭한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우리는 근처의 궁전제과 지점을 다시 찾았다.
운 좋게도 가게 바로 앞에 주차 공간이 비어 있었다.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빵집의 외관과 주차된 차의 모습이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유럽의 어느 골목에 와 있는 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러 이국적인 컷 하나를 수집했다.
어제 전시장에서 보았던 정교한 예술 작품도 좋았지만
여행의 끝자락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런 일상의 프레임 또한 우리에겐 소중한 작품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무등산친구 초코케이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지난번 방문했던 지점과는 또 다른 이곳만의 매력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같은 빵집이라도 공간이 주는 공기에 따라 맛의 기대치도 조금씩 달라지는 법이다.
양손 가득 들린 빵 봉투들 그리고 휴대폰 속에 담긴 이국적인 사진 한 장.
광주를 떠나기 전 우리는 갤러리가 닫힌 월요일의 공백을 가장 풍요롭고 달콤한 방식으로 채워 넣고 있었다.
빵 봉투를 든든히 챙긴 뒤 우리는 이번 여행의 진짜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사전 조사 당시 월요일에도 문을 연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찾아간 곳
바로 우제길미술관이었다.
월요일의 공백을 우제길 화백의 강렬한 빛의 화폭으로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진실은 가혹했다.
"카페는 열지만, 갤러리는 문을 닫습니다."
카페의 고소한 커피 향이 오히려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굳게 닫힌 전시장 문 앞은 고요했다.
아마도 월요일이라는 요일의 관성이 우리 형제의 치밀했던 계획보다 조금 더 강력했던 모양이다.
동생과 나는 한동안 갤러리 입구 근처를 서성이다가 결국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모든 것을 완벽하게 털어버리고 가는 여행보다
못다 본 작품 하나를 마음 한구석에 남겨두고 떠나는 여행이 더 오래 기억되는 법이니까.
우제길 화백이 캔버스 위에 쏟아낸 그 빛들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은
자연스럽게 다음에 또 광주에 와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 닫힌 문을 등지고 서서 채워지지 않은 여백만큼 더 커진
광주에 대한 애정을 안고 서울행 여정에 올랐다.
우제길미술관에서의 허탈한 발걸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다.
마지막 일정이 조금 맥없이 풀리는 바람에 마무리에 힘이 빠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다행히 고속도로는 큰 정체 없이 우리를 서울로 이끌었다.
내려올 때는 자욱한 새벽 안개를 헤치느라 차체가 엉망이 되었는데
올라오는 길은 하늘이 대신 세차해 주려는지 거센 폭우가 쏟아졌다.
맘 졸이며 스티어링 휠을 잡은 채 두 시간 넘게 비바람으로 차를 '세척하고 린스'하는 진풍경을 겪으며
우리는 꼬박 5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비록 몸은 녹초가 되었고 차는 빗물에 흠뻑 젖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하루 반나절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광주의 예술과 맛
그리고 예상치 못한 우연들을 빼곡하게 채워 넣은 덕분이다.
동생과 티격태격하며 보낸 그 시간은 폭우 속에서도 씻겨 내려가지 않을 단단한 추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