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드 광주 4편
영화 <주디>의 여운은 길었지만 상영관을 나선 우리를 맞이한 건
지독한 허기와 급격히 몰려온 피로였다.
유스퀘어 인근에서 서둘러 저녁을 해결하려 했지만
눈에 띄는 곳이라곤 온통 체인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뿐이었다.
광주까지 와서 하루를 햄버거로 마무리할 수는 없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붙들고
우리는 숙소 근처인 풍암호수공원 쪽으로 이동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그 상황에선 돌을 씹어도 달게 느껴질 법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음식이 입에 감기다 못해 '쫙쫙 붙는' 느낌이었다.
지쳐서 감각이 마비된 줄 알았는데 미각만큼은 생생하게 살아나 춤을 추고 있었다.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오는데 동생이 입구 쪽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엔 자부심 가득한 최강달인맛집 명판이 걸려 있었다.
몸은 고되고 정신은 혼미했어도 예술을 찾아 광주 전역을 누빈 우리의 '안목'은
식당을 고르는 순간까지 똑바르게 살아있었던 것이다.
고단했던 하루가 달인의 손맛과 함께 완벽하게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달인의 손맛에 감동하며 쌍따봉을 치켜세웠던 저녁 식사를 마치자
비로소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 야경이 그렇게 예쁘대."
동생의 한마디에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풍암호수공원으로 향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점령한 도시의 밤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호수를 둘러싼 2km 남짓의 산책로는 뜻밖의 평온을 선물했다.
우리는 사브작사브작 걷기 시작했다.
때로는 여행 중 쌓인 피로 때문에 티격태격 투덜대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에 드는 빛의 지점 앞에서 멈춰 서서 서로의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서울의 밤이 잠들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이곳 광주의 밤은 수면에 비친 은은한 조명들이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소박한 빛들이 빚어내는 그 정갈한 조합이 어쩐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그 빛의 일렁임을 음미했다.
요란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하루 종일 찾아 헤맸던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지도 몰랐다.
2km의 산책을 마치고 나니 몸의 피로 대신 맑은 공기와 따뜻한 빛의 잔상만이 기분 좋게 남았다.
풍암호수의 밤 산책을 마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이번 여행의 숨은 공신인 '근로자 휴가 지원 사업' 포인트를 알뜰하게 쏟아부은 숙소였다.
사실 처음부터 호캉스를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포인트를 가장 가치 있게 쓰고 싶어 발품을 팔다 보니
운 좋게도 광주의 근사한 호텔에 짐을 풀게 된 것이다.
미술관을 종일 누비고, 주차 대란을 뚫고 영화를 관람하며, 달인의 맛집을 찾아 헤맸던 우리에게
이 예정에 없던 호캉스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폭신한 침구와 정갈한 객실의 분위기는 오늘 우리가 마주한 '아트 인사이드'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동생과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의 조각들을 되짚어 보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예술이었고, 입에 닿는 것마다 감동이었던 시간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은 포인트가 이렇게 완벽한 하룻밤으로 치환될 때
우리는 다음 여행을 기약할 힘을 얻는다.
"다음에 또 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지막이 뱉은 그 약속은
광주라는 도시가 우리에게 준 가장 따뜻한 확답이었다.
호텔 방의 조명은 아늑했고 그냥 잠들기엔 광주의 밤이 주는 여운이 너무도 짙었다.
나는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 한 남자>를 꺼내 들었다.
한남동의 어느 카페에서 전작인 <연인들>을 탐독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넘긴 책장은
판소리의 가락처럼 이곳저곳으로 뻗어 나가는 만연체의 향연이었다.
전작보다 다소 파편화된 구성 탓에 리니어하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미혼인 내가 짐작하기 힘든 결혼 생활의 '푸석거림'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전해졌다.
주인공 벤과 엘로이즈 사이의 그 건조한 공기가 활자 밖으로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던 중,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 찾아왔다.
소설 속 문장 사이에서 내가 지금 몸을 뉘이고 있는 이 호텔의 이름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벤과 베키라는 인물이 부적절한 만남을 갖는 장소로 묘사되고는 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내가 읽고 있는 소설 속 배경이 지금 내가 숨 쉬는 이 공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뒤통수를 얻맞은 듯한 전율이 일었다.
서울에서 챙겨온 책이 광주의 숙소와 이토록 정교하게 맞물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트 인사이드 광주"라는 테마를 따라온 여정의 끝에
나는 스스로가 소설 속 배경의 일부가 되는 기묘하고도 재미있는 경험을 마주하고 있었다.
비록 소설 속 서사는 씁쓸한 불륜이었지만 그 우연이 준 즐거움은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할 만큼 충분히 '예술적'이었다.
2020년 1월의 광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평범한 여행자로 머물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