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드 광주 3편
여행의 오후는 나를 다시 광주로 이끌었던 자석 같은 곳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으로 이어졌다.
지난 방문 때 다 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발길을 재촉했다.
지상으로 솟은 건물이 아니라 지하로 깊게 침잠하며 빛을 빨아들이는 이 독특한 건축물은
볼 때마다 광주가 품은 내면의 힘을 상징하는 것 같아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구석구석을 누볐다.
지난번에 놓쳤던 새로운 전시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기분은
마치 밀린 숙제를 가장 즐거운 방식으로 끝내는 기분이었다.
특히 나를 붙잡아 세운 곳은 다름 아닌 아카이브였다.
방대한 기록과 자료의 숲을 헤매다 보니 어느덧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자칫하면 오늘 안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유분수 섞인 걱정이 들 만큼 ACC의 기록들은 깊고도 방대했다.
예술은 결코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촘촘한 기록과 기억이 쌓여 완성되는 것임을 다시금 실감했다.
전시의 여운을 안고 들른 아트샵은 여행자의 물욕을 다정하게 자극했다.
평소 마음에 두었던 굿즈들을 골라 담고 참여한 이벤트 뽑기.
톡 하고 터진 캡슐 안에서 나온 문구는 마치 오늘 나의 여행을 축복해 주는 듯했고
덤으로 얻은 마스킹 테이프는 그 자체로 완벽한 기념품이 되었다.
전통 회화의 변주를 보았던 오전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거장의 시선
그리고 이곳 ACC의 방대한 기록들까지. 마스킹 테이프 한 줄을 쓱 긋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조각들이 선명하게 이어질 것 같았다.
아카이브에서 길을 잃을 뻔했던 그 짜릿한 몰입은
역설적으로 내가 광주의 예술 속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전시 관람으로 한껏 예민해진 감각을 이어가고 싶어
내가 먼저 동생에게 '아트버스터' 한 편을 보자고 제안했다.
목적지는 광주 유스퀘어. 하지만 우리는 설 연휴와 대형 터미널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화려한 컬래버레이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상영 30분 전 도착했음에도 주차장에 진입하는 데만 꼬박 40분이 걸렸다.
결국 상영 시작 3분 만에 극장 좌석에 간신히 '터치다운'했다.
숨을 헐떡이며 마주한 스크린에는
2020 아카데미 기획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영화 <주디>가 흐르고 있었다.
영화는 화려한 스타 주디 갈랜드의 이면
아역 시절부터 이어진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신음하던 인간 '주디'를 비추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런던 무대에 서야만 했던 그녀의 절박함이 스크린을 뚫고 전해졌다.
영화는 현재의 주디와 과거의 상처를 교차 편집하며
그녀가 왜 그토록 망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당위성을 묵직하게 설득해 나갔다.
연예계의 묵인된 부당함이 한 천재를 어떻게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는지 지켜보는 마음은
미술관에서 느꼈던 감동과는 또 다른 결의 통증이었다.
영화의 메인 테마인 'Over the Rainbow'가 흐를 때
나는 문득 쳇 베이커의 재기를 담은 영화 <본 투 비 블루>를 떠올렸다.
무지개 너머를 꿈꾸지만 정작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푸른빛 우울함에 젖어 있는 두 주인공의 처연함.
그 지독한 공통점이 가슴을 저미게 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나는 또 다른 충격에 휩싸였다.
주디 갈랜드 역을 맡은 배우가 르네 젤위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 사랑스럽고 통통 튀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주디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그녀의 경이로운 변신은
오늘 하루 보았던 수많은 예술 작품 중 가장 강렬한 '살아있는 조각'처럼 느껴졌고
주차 대란을 뚫고 달려온 보람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