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행선지로 가기 전에 잠깐 샛길로 빠지기..... 2/2
보성에서의 깊은 여운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여수국제미술제를 관람하기 위해 다시 가속페달을 밟았다.
남도의 길을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은 여수엑스포전시홀.
고요한 산사에서 나와 다시 활기 넘치는 현대미술의 현장으로 발을 들였다.
압도적인 규모 속에 흐르는 '침묵'과 '금기어'라는 주제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여순사건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가 관통해 온 비극적인 사건들과
일상 속에서 터부시되던 영역들을 예술로 응축해 낸 작품들을 마주했다.
그 작품들은 나에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게 하는 귀중한 성찰의 기회를 선사해 주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뱅크시의 작품들을 직접 마주했다는 사실은 기대 이상의 전율을 불러일으켰는데
특유의 풍자와 메시지가 담긴 작품 앞에 한참을 서서 그 여운을 곱씹었다.
전시가 주는 울림에 흠뻑 빠져 있었던 탓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아쉽게도 원래 계획했던 여수 테디베어 뮤지엄은 관람 시간을 놓쳐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미술제에서의 경험은 밀도가 높았다.
해 질 녘까지 미술제의 여운을 즐긴 뒤
작년 출장 때부터 꼭 함께 보고 싶었던 야경을 찾아 광양항 해양공원으로 향했다.
근처 마트에서 산 간단한 먹거리를 들고 도착한 주차장.
남들은 텐트에 의자에 온갖 장비를 갖춰 자리를 잡았지만
우리에겐 픽업트럭의 적재함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쿨하게 적재함 위로 돗자리를 깔고, 수납함과 박스를 거치대 삼아 우리만의 조촐한 식탁을 차렸다.
적재함 램프가 은은한 조명이 되고 블루투스 스피커의 선율이 더해지니 그 어떤 루프탑 바도 부럽지 않았다. 그곳에서 바라본 이순신대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애초에 차가 이런 치트키가 될 줄은 몰랐다
일머리를 가장한 나의 잔머리가 하늘에 뜬 보름달보다 더 빛나던 2020년 추석의 완벽한 밤이었다.
여기서 하루가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잠시
바다가 보이는 영화관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곳이 있다기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화면 속 사진을 보며 신기해하고만 있을 시간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는 생각이 들었고
망설임 없이 광양에서 삼천포로 발길을 돌렸다.
호기심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긴 했으나 막상 상영 시간표 앞에 서니
<국제수사>와 <담보> 사이에서 거대한 고민에 빠졌다.
평소 CGV 아트하우스의 예술 영화들을 즐겨 찾는 내 입장에서
추석 대목을 겨냥해 기획 상품처럼 쏟아진 두 영화 모두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가 보이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경험을 만끽하기 위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선택지 중 그나마 나은 ‘차악’을 골라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지만 박소이 배우의 불가항력적인 귀여움에 이미 '심쿵사' 당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를 핑계 삼아 결국 <담보>를 선택했다.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운 연기력 덕분에 걱정했던 취향의 간극은 사라졌고
빼어난 창밖 풍경과 영화적 재미를 모두 챙긴 훌륭한 선택이 되었다.
상영 전, 단돈 천 원으로 누린 안마 의자의 휴식과 리조트 내에 자리 잡은 영화관의 특별한 위치까지...
삼천포 바닷물만큼이나 짭조름하고 알찬 사치를 만끽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