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감상과 완벽한 방전 사이, 영월의 두 얼굴
문득 작년 강원트리엔날레를 보러 홍천으로 향하던 길의 악몽이 떠올랐다.
한 시간의 여유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었던 무자비한 도로 위에서의 고생.
이번엔 전술을 바꿔 한 시간 반의 예비 시간을 벌어두었건만
곤지암 부근에서 또다시 '정체'라는 불청객을 만났다.
하지만 한 번 데인 기억은 무서운 법!
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어 우회로를 택했다.
맥드라이브에서 커피를 챙기고 휴게소에 잠시 들르는 여유를 부렸음에도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각은 기적처럼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오전 10시 1분
나는 승리자처럼 영월의 첫 경유지에 발을 내디뎠다.
강렬한 빨간 대나무 숲을 연상시키는 입구를 지나자
순백의 건물이 우리를 반기며 본격적인 여행의 서막을 알렸다.
그곳에서의 두 시간은 단순한 관람 그 이상이었다.
"이건 그때 그 작품이랑 비슷하지 않아?"
"저건 그 전시회에서 본 기법 같은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는 우리만의 예술적 지도를 넓혀주었다.
작품 사이사이를 뚜벅뚜벅 걸으며 취향을 공유하는 재미
그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매력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찬란한 햇살 사이로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야외에 놓인 설치 미술품들을 마주하는 동안
4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으며 쌓였던 피로는 어느새 바람에 씻겨 내려갔다.
관람을 마친 뒤 우리는 차로 돌아와 적재함 데크에 털썩 걸터앉아
눈앞의 예쁜 풍경을 반찬 삼아 베어 문 피자의 맛이란!
원래는 '아침 식사'용이었으나 어느덧 '브런치'가 되어버린 늦은 첫 끼였지만
그 어떤 만찬보다 완벽한 영월의 첫 성찬이었다.
근데 이 공간 낯설지 않다 했더니 강릉 정동진의 하슬라 아트월드와 호형호제하는 공간이었다.
같은 결을 가진 공간을 마주하니 잊고 있던 옛 여행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날씨가 좋아 피부가 홀라당 탔었는데
다행히 오늘의 햇볕은 그때만큼 잔혹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 덕분에 그 뜨거움을 기꺼이 누릴 여유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달 와이파크를 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중
영월 10경의 명성에 홀려 잠시 한눈을 팔기로 했다.
하지만 그놈의 '우격다짐'이 문제였다.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단숨에 전망대를 주파하느라 남은 체력을 탈탈 쥐어짜 버렸다.
분명 영월이 자랑하는 비경이었지만 현실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과 다를 바 없었다.
인증샷 인파 너머로 목을 쭉 빼고 풍경을 훔쳐봐야 하는 상황.
결국 동생과 "탈출하자"는 무언의 사인을 주고받았다.
올라갈 때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탓에 선비처럼 느긋하게 뒤따라온 동생이 아니었다면
아마 산길 한복판에 가방을 내팽개치고 대자로 드러누웠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