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캉깡캉~~~~"
산책길 비닐하우스 앞에 묶여있는 믹스견 한 마리가, 내가 지나갈 때마다 미친 듯이 짖는다.
거친 숨소리에 이까지 부딪쳐가며 목이 터져라 짖는다.
"쳐다보지 마! 만지지도 마! 가져가면 죽는다! 내 새끼야. 내 새끼라니까."
뭐, 나름 해석해보면 이런 의미 아닐까?
어린 새끼 세 마리가 어미 주위에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논다. 찢어진 헝겊을 물어뜯고, 서로 장난을 친다. 이제 조금 컸다고 비닐하우스 뒤 논밭을 헤매고 다니고, 경사진 개천가를 기어 내려가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붙들려오고, 오가는 사람들의 신발 뒤꿈치를 쫓아 긴 외출을 단행하기도 한다.
산책길 어미와 새끼"가져갈 사람은 새끼 가져가셔도 돼요."
무료 분양 글이 매직펜으로 비닐하우스 입구에 큼직하게 쓰여있다.
자기 새끼라고 어찌나 짖어대는지, 우리 집 댕댕이 까뭉이도 그 옆을 지나갈 때는 모성 백배 충만한 그 어미개를 슬슬 피해 뒤도 안 돌아보고 얼른 앞서간다. 어미라 그렇다. 어미가 자기 새끼 누가 해칠까 봐, 누가 가져갈까 봐 그러는 거다.
1~2주 지나니 두 마리는 입양됐는지 한 마리만 눈에 띈다. 자기 새끼, 자기 품 떠나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얼마나 목이 터져라 짖어댔을지... 짠하다.
한 놈만 남았다"나아실 제 괴에에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사람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오~오생 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으~으~은혜는 가이없어라. "
누가 가사를 썼는지 참, 절절하게도 썼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없던 효심도 생겨나고, 부모에게 잘못한 일 샅샅이 긁어모아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우리 엄마도 내 어릴 때 몸 약해 고생했던 얘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한밤중에 등에 둘러업고, 불빛도 없는 시골길을 몇 리나 걸어 의원 문을 두들겨 겨우 살려낸 얘기, 숨넘어가는 아이 코 빨아서 목숨 건진 얘기 ….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불안하다. 불안의 이유는?
불안하다. 내가 효도 많이 해야 할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내가 효도 많이 해야 할까 봐. 그러다 온전한 내 삶을 살지 못할까 봐.
부모는 자기 새끼 낳아 독립할 때까지 돌봐주는 것. 부모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자연계 어떤 동물도 다 큰 새끼를 옆구리에 끼고 보살피지도, 다 큰 새끼가 먹을 것 없다고 어미 둥지로 다시 날아들지 않는다. 인간만 그런다.
자식 낳아서 독립할 때까지 먹이고 입히고, 여력이 되면 교육시키는 건 자랑도 아니고 은혜를 베푼 것도, 보답받을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That's my job.' 이어야 한다. 낳았으니 독립할 때까지 키워주는 건 당연히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비닐하우스 댕댕이도 아파트 길고양이도, 개천의 오리도 모두 그렇게 한다.
그런데 부모는 자신이 키워놓은 자식에게 바라는 게 참 많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부터 시작해서 "자식 다 키워놓아도 소용없다."까지 타령이 끝이 없다. 자식 키워, 어디 국 끓여먹으려고 키웠는지, 자식 키운 공을 돌려받으려 한다. 부모가 자식 키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자식에게 빚진 것 갚으라 한다. 20살 성인 될 때까지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면 그건 미안해야 할 일이지, 그렇게 했다고 생색내며 효도받을 일은 아니다. 자식이 마음이 동해서 부모에게 잘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지, 의무가 아니다. 자식이 효도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을 일은 더욱 아니다.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엉켜 진창 되지 않으려면,
1. 과제를 분리한다.
낳아서 20살까지 키워주는 건 부모의 과제, 20살 넘어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사는 건 자식의 과제. 어른되어서도 부모 날개 밑에 숨어 의존하거나, 어른된 자식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하면 안 된다.
"먼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를 생각하게. 그리고 과제를 분리하게.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걸세.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미움 받을 용기>
부모가 무리하게 지원해주고 자식이 은혜 갚길 바라기보다, 안 해주고 안 받는 게 맞다. 다 큰 자식은 더 이상 부모에게 요구하지 않고 '효'라는 마음의 짐도 내려놓는 게 최선이다. 서로의 영역을 분리하고 존중해주는 게 진정한 과제 분리다.
2. 부모-자식은 제로 베이스에 서야 한다.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제로 베이스, 백지상태가 바람직하다. 내가 무리하게 부모에게 받으면, 나도 무리하게 부모에게 돌려줘야 하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3. 부모든 자식이든 서로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걱정, 불안에서 나온 거친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다. 걱정돼서 그러는 건 안다. 부모님이 살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으니 한마디라도 거들면 내 새끼에게 도움될까 싶어 그러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말로 도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식과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거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이 5만 원이면 그만큼만 줘도 훌륭하다. 딱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그것도 서로 고마워하면 된다. 한 달에 한 번 자식이 전화해주면 그것도 고맙고,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여주면 그것도 고맙다 생각하면 된다.
다 큰 자식도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부모가 해주면 고맙고, 안 해주는 건 당연하다. 부모에게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하면 그게 부모에 대한 '효'다. 잔소리나 넋두리 들어주기, 비타민제를 사서 보내드리기와 같은 나의 '연민'이나 '형편'에서 가능한 정도까지만 하면 된다.
"부모에 대해 부담을 갖는 것도 집착이다. 돌볼 수 있으면 돌보고, 못 돌보면 안 돌보면 된다. 마음에 원망을 가지고 잘해주는 것보다, 자기 삶을 사는 게 훨씬 낫다. "-법륜스님 즉문즉답
4. 자식은 자기 방식대로 잘 살면 된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내 자식 잘되는 것. 내 자식 행복한 거다. 내가 잘 살면 된다. 부모의 기대나 기준이 아닌, 내 방식으로 잘 살면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코로나 바이러스 걱정이 가득이다. 난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백신도 없이 평생 걸렸다 나았다를 반복하고 있는 나의 '착한 딸 바이러스'가 더 걱정이다.
오후 3시쯤 되니, 꼭 닫혀있던 딸내미의 방문이 조용히 열린다. 올해 스물, 대학 입학을 앞둔 딸내미가 비몽사몽 갈지자로 화장실로 향한다. 난 '딸냄! 잘 잤어?'라는 상냥한 인사 대신 이렇게 소리치고 만다.
"딸냄! 넌 나한테 효도 같은 건 안 해도 돼."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싶어, 딸내미는 잠도 덜 깬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효도할 마음도 계획도 애당초 없었을 딸내미에게, 난 오늘도 뜬구름만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