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김밥 남은 것 없어?"
"으흠.. 어묵국은 있는데..."
남편이 출출하다며 점심때 먹고 남은 김밥을 찾는다. 난 말꼬리를 흐리며, 어묵국 한 사발을 넉넉히 떠서 남편에게 내민다. 먹다 남은 김밥은 학교에도 못 가고 발가락까지 부러져 목발 신세 지고 있는 딸내미 거다.
난, 먹는 것 가지고 남편과 딸내미 차별 중이다.
'그건 차별이 아니고 당연한 보살핌이야.'그런 내 마음을 남편도 백번 이해하겠지만, 모든 차별에는 나름의 이유가 다 있다.
차별은 노력한다고 안 하게 되는 게 아니다. 마음이 저절로 그리 가는 걸 어쩌랴? 부모는 같은 자식도 차별을 한다. 차별 안 한다고 우기고, 차별 안 받는다고 믿고 싶을 뿐.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차별받는 줄도 하는 줄도 모르고 살까 봐.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차별받는 줄도 하는 줄도 모르고 살까 봐. 내 잘못인 줄 알고 평생 노력할까 봐.
차별: [명사]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
1. 차별은 생길 수밖에 없다.
평생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좋은 건 가까이 싫은 건 멀리하려고 노력하다 지치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자식들에게 선호가 없다고? 같은 자식이니 동등하게 대한다고? 같은 부모 가졌다는 것 말고 같은 건 하나도 없다. 성별, 생김새, 건강, 성격 모두 다르다. 자라면서 아이 품성이 다르고 부모와의 교감이 다르고, 삶의 궤적에서 함께 나누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 두 개 이상의 다른 대상에는 구별과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쁜 자식, 안 이쁜 자식 분명히 있다.
2. 차별은 사랑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미움'까지도 간다.
"딸들만 유학 보내고 내 아들 유학 못 보낸 게 한이다."
평생 단 한 번도 아들 편이 아닌 적이 없었던 엄마는 말했다. 오빠는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부모는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키우고 똑같이 사랑할 거다.'라는 믿음으로 인생을 시작한 자식은 ' 이게 뭐지? 이건 아닌데.' 백번쯤 외치다 자신도 부모가 된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질지도 모르지만, 힘든 살림에 독박 육아를 경험해보면 안다. 부모도 인간이고 가진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는 걸. 쏟아부을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부족하면 무의식적인 배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한 아이에 대한 사랑이 클수록, 다른 쪽은 '밉다.' 이쁜 놈 더 입히고 더 먹이고 더 많이 공부시킬 수 있는데, 그 아이의 몫을 빼앗아가는 놈은 미울 수밖에 없다.
3. 차별은 차별대로 하고, 자식에게 부채와 죄책감까지 갖게 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맞는 말이다. 깨물면 당연히 다 아프다. 그래도 똑같이 아프진 않다. 어금니로 힘껏 깨물어 뼈 절단난 손가락도 있고, 다칠까 봐 살짝만 깨물어 침만 묻은 손가락도 있다. 열 손가락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은 '부모 사랑 의심 말고 효도하라.'는 말이다. 자식 차별 안 한다고 우길 때 꼭 끄집어내서 쓰는 쓸데없는 속담이다.
이쁜 놈, 안 이쁜 놈 구분에 아들 딸 구분까지 들어가면 심각하다. 유전자에 뿌리 박힌 종족보존, 자기 보호 본능으로, 아들에겐 돈 퍼부고, 재산 몰아주면서 딸들에게는 감정 받이에 투자한 돈 회수까지 바란다. 필요할 때는 '딸이 있어야 한다. 딸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누구 집 딸은~~' 하면서 착한 딸 콤플렉스까지 자극하면서, 부채의식과 죄책감을 인생 끝날 때까지 심어준다.
4. 차별은 세습된다.
나에게서 차별이 끝나지 않는다. 결혼하면 그 배우자, 자식 낳으면 그 손주들까지도 비례해서 차별한다.
부모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 변한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 동안 쌓아온 기억과 습관의 힘으로 화석처럼 신념이 박혀있다. NEVER NEVER NEVER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의 차별을 대하는 자식의 현명한 전략은?
1. 내 잘못 아니다.
내 부모는 날 다른 자식과 똑같이 사랑한다는 허상부터 버리자. 부모의 차별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사랑을 적게 받는 것도 미움받는 것도 아니다. 부모 세팅이 그냥 그렇게 되어 있다. 주어진 세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내 잘못 아니다.
2. 애정 갈구는 그만하자.
어렸을 때는 부모 사랑 못 받으면 죽으니까 그 사랑에 목맨다. 내가 잘못해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계속 부모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쓴다. 내가 더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사랑받을 거라 미련을 못 버리고, 상처 받으면서도 안쓰럽게 재도전을 계속한다.
엉뚱한 자식에게 덕 본다는 말이 있다. 뒤늦게 분발해서 부모 인정, 사랑받아보겠다는 안쓰러운 노력일 수 있다. 어떻게든 부모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쓰는 마음을 버려야 자유로워진다.
3. 마음이 시키는 것만큼만 하자.
"부모인데 어떻게 그래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후회할까 봐 내 마음 꾹꾹 눌러가며 '효도'라는 걸 이어간다. 그만큼 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도 함께 흘러간다.
"부모에 대해 부담을 갖는 것도 집착이다. 돌볼 수 있으면 돌보고, 못 돌보면 안 돌보면 된다. 마음에 원망을 가지고 잘해주는 것보다 자기 삶을 사는 게 훨씬 낫다. 자식의 앞길을 막는 부모에게 잘해주는 건 효도가 아니다."
-법륜스님
4. 하고 싶은 말은 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
대립각 무서워말고 하고 싶은 말, 부모에게 한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섭섭한지도, 내 마음이 얼마나 문드러지는지도 그들은 모른다. 말은 하되, 기대는 접는다.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관계에서 자유가 보인다.
10년 동안 부모 때문에 비참한 인생 살았는데, 부모가 이제 와서 잘못했다 미안하다 말해도, 10년 힘든 내 인생 복구되지 않는다. 지금 잘 살아야 한다.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부모 바라보며 상처 받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하며 지금 잘 살아야 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버지, 누나는 뭐 좋아해요?"
"단팥빵."
안쓰러운 누나에게 단팥빵을 잔뜩 사다 주며 남동생이 말한다.
"누나 많이 먹어!"
"난 단팥빵 안 좋아해. 단팥빵은 네가 좋아했지. 난 크림빵 좋아해."
아버지가 추천한 단팥빵은 딸인 지영이가 좋아하는 빵이 아니고, 실은 아들이 어렸을 때 좋아하던 빵이었다. 난 이 에피소드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 딸자식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 먹는지 아는 아버지를 가지면 그 딸은 참 행복하겠다.
내일은 김밥을 20줄쯤 푸짐하게 싸서, 남편에게 생색내며 내밀어야겠다.
남편이 딸내미와의 차별을 알아차리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