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망해야 새 것에 겨우 맘이 간다

[불안의 진짜 이유] 안경 집착

by 글쓰는공여사

"새 안경은 왜 안 쓰고 다녀?"

봄에 새 안경해 놓고 가을이 되도록 안 쓰고 다니니, 남편이 묻는다.

"누진다초점이라 어지럽고 불편해서..."

"그래도 적응해야 하지 않을까?"
"... 아니. 지금은 그냥 이 안경 쓸래."

"그러다 죽을 때까지 그 안경만 쓰는 거 아냐?"
"나 죽으면 이 안경도 관 속에 넣어줘. 눈 안 보이면 저승길 못 따라갈지도 모르니까. "

"?!?!?!"
남편에게 그런 '음침한 유언'도 농담처럼 미리 남겼다.


그런데,

"뚝"

하루아침에 쓰고 있던 안경테가 부러졌다. 렌즈와 다리 이음새 금속이 동강 끊어진 거다. 비전문가인 내 눈으로 봐도 수리가 어려워 보인다. 20년 같은 안경테를 썼더니, 안경을 생체이식이라도 한 줄 알았나 보다. 부러진 안경을 들고 내 마음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렇게 뚝!


불안하다. 그 이유는?

불안하다. 안경 못 고칠까 봐. 불안의 진짜 이유는?

불안하다. 안경 못 고칠까 봐. 내 몸은 늙고 변하는데 여전히 마음은 못 따라갈까 봐.


이젠 어쩔 수 없이 새 안경을 집어 든다. 높아진 시력에 두꺼워진 렌즈에 다초점에, 어느 것 하나 맘에 안 찬다. 계단에선 어지럽고 식탁은 울렁댄다. 초점을 제대로 못 맞추니, 책 읽는 게 고역이다. 글자 한 자 한 자 읽느라 머리에 쥐가 난다. 삶의 질이 똑 떨어진다.


부러진 안경, 살려낼 방법을 검색해본다. 눈은 더 아프고, 기필코 고치고 말겠다는 집착은 오공본드만큼 강다. 주말이 너무 길다.


그 안경을 못쓴다 생각하니 좋은 점만 보인다. '나에게 정말 잘 어울렸는데... 쓰면 정말 편했는데...' 그 안경으로는 핸드폰 글씨도 안 보인다는 치명적인 단점은 절대 생각나지 않는다. 상황이 변했으니 새로운 안경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마음의 저항이 이리 심하니 눈의 적응은 더욱 느리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려고 한다.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노력을 관철시킨다." -조지 버나드 쇼 <혁명론자를 위한 좌우명>


내가 이성적인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눈이 뭐 어쨌다고?

"회사 가는 게 너무 싫어요. 퇴직까지 버텨야 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데, 죽을 맛이에요."

후배의 반복되는 넋두리가 몇 년째 계속된다.

"그만둘 방법을 찾아봐."

내 대답도 한결같다.


그런데 만나고 보면 바뀐 게 없다. 왜? 아직 살만하기 때문에. 아직 덜 망했기 때문에. 일하는 건 미치도록 지겹지만, 다른 직장을 모색할 만큼 그걸 행동으로 옮길 만큼은 아직 아닌 거다. 그럴듯한 직장 타이틀도,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도, 미래의 연금도 여전히 위안이 될 테니까.


그냥 딱 완전히 망해야 새로운 궁리를 한다. 회사가 망하거나 구조조정으로 잘리거나 가족이 모두 이민을 가야 하거나, 결혼으로 이 도시를 뜨거나. 완전히 망하기 전까진 모두가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못 벗어난다. 일상 속에서 바삐 움직이며 열정적으로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라 착각하며.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하면, 술 쳐 먹고 지랄을 한다. 내가 버린 패가 아니기 때문에, 구여친의 좋은 점만 기억난다. 그걸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생각하니 미칠 노릇이다. 인간은 원래 손에 쥔 걸 잃어버리는 손실의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운 족속이다. 아무리 새로운 사람이 옆에서 대시를 해도, 떠나보내지 못한 구여친 때문에 여지를 안준다.


그러다 구여친이 새남친 사귀고, 치명적인 베드신이라도 목격하면 눈 돌아간다. 자기 사탕 빼앗긴 아이처럼 한 바탕 치고받고 치졸한 몸싸움이라도 벌이다, 구여친이 그놈 피를 닦아주고, 나에겐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러대면, 그땐 정신이 번쩍 든다. 세상 끝, GAME OVER다. 미련 한 톨 없이, 저런 미친년을 내가 좋아했나 마음 정리가 싸악 된다.


직장도 인간관계도 안경도 완전 망해야 새 것에 겨우 맘이 간다. '포기'라는 걸 하고, 현실을 '인정'하고, 새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을 비운다. 그럴 때까지 마음이 힘든 건 두말할 것 없다. 그건 우리가 딱 한 가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실 때문이다.


"Everything changes."




"수리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일단 보내보기는 할게요."

안경원에서 내 20년 지기 안경테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슬픈 답변을 내놓는다.


옛 애인은 떠나고, 새 애인은 정이 안 가고.

지금이 제일 힘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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